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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22

주의소유권, Attention Ownership

주의소유권은 내가 어떤 자극을 받을 것인지 숙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현대인들은 플랫폼 기업의 주의소진 전략으로 인해 본래 잠시 머물러야 하는 플랫폼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더 걱정되는 점은 그 전략이 너무도 교묘해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한 중독을 일으키는 플랫폼 기업의 주의소진 전략이 지금까지는 너무 당연시 여겨져 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플랫폼에서 빼앗기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라며, 주의소유권이 앞으로 10년 뒤 더 교묘해지고 치밀해질 플랫폼 기업의 전략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가 되길 기대한다.

누군가의 이야기

한심이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알람을 10분 간격으로 다섯 개를 맞추고 잤는데도 결국은 제때 일어나지 못해 지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밤 12시 즈음, 한심이는 침대에 누웠다.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모두 확인하고 심심해진 한심이는 유튜브 앱을 띄웠다. 그런데 맙소사, ‘최애’ 아이돌 투앤온리(2&ONLY)의 컴백 무대 영상이 드디어 올라온 것이다! 이걸 못 보고 잔다는 것은 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그렇게 한심이는 황홀한 5분을 보낸 다음,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잠을 자기 위해 이불을 덮었다.

아,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영상을 하나만 보고서 자려니 어째 아쉬운 느낌? 결국 좀비가 무덤에서 나오듯, 다시 일어나 스마트폰을 잡았다. 투앤온리가 출연한 예능 클립을 틀었다. 그 영상은 이미 봤었고, 전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시 켰다. 그렇게 손이 가는 대로 예능, 라이브, 음악방송 영상을 시청하다보니, 결국 새벽 두 시가 되고야 말았다. ‘이제 자야지’, 내일을 생각하며 머릿속에 되뇌었지만 손은 여전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끝내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때, 충혈된 눈으로 바라본 시계는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심이는 자괴감이 들었으나 멍해진 정신에 그 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현실의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주의소진 Attentive exhaustion

한심이는 정말 한심한가? 한심이가 진정 게으르고 방만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심이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 말고는 잘못이 없다. 교묘하고 영악하게 설계된 공간, 인간이라면 빠질 수밖에 없는 덫이 문제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우리에게 자유는 없다.

인간의 주의(主意)는 특정 규칙을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그 규칙들을 이해한다면, 한 개인의 주의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는 실제로 많은 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소비자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효과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통해 소비자의 주의와 관심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얻고자 한다. 특히 플랫폼 기업의 경우, 플랫폼에서의 체류 시간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우리의 주의를 소진시킨다.

주의소진은 크게 주의마비주의강탈로 구분된다. 주의마비란, 기업이 소비자들의 정상적인 사고 기능을 무너뜨려 신중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는 행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를 멍하게 만드는 것이다. 멍한 의식은 절제와 행동력을 상실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깨어 있지만, 불합리한 판단을 하게 되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아도 이를 고치지 못한다. 김병규 교수는 그의 저서 『호모 아딕투스』에서 이것이 도박꾼들의 심리와 일치한다고 지적한다.[1] 슬롯머신 앞에 죽치고 앉은 도박꾼들은 현실에 대한 걱정, 사회적 요구 따위에서 자유롭다.[2] 슬롯머신이 멈췄을 때 그는 순간 현실을 인식한다. 하지만 터치 한 번만으로 다시 시작되는 게임에 불편한 현실은 손쉽게 외면된다. 5초 후 자동 재생되는 추천 영상, 화면을 당기기만 하면 제공되는 새로운 즐거움, 디지털 플랫폼은 실로 도박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의마비와 함께 우리는 나날이 도박꾼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는 셈이다.

주주의강탈은 말 그대로 소비자들의 주의를 빼앗는 것을 말한다. 즉, 기업이 사용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주입하는 행위를 주의강탈이라 한다. 우리가 매일 같이 마주하는 수많은 광고들이 모두 주의강탈의 좋은 예이다. 여러분이 광고 기획자가 아닌 이상, 광고를 원해서 본 일은 정말 드물 것이다. 원치 않는 광고들은 무엇보다도 짜증을 유발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주의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교묘하게 설계된 디지털 광고들은 단순 짜증을 넘어 우리에게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주의를 뺏기는 동시에 새로운 생각이나 욕망에 젖어 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주의강탈은 주의마비와 결합되어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절제력이 떨어진 순간에 들어오는 자극들은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10년뒤, 우리는 디지털 공간에서 더 오래, 더 완전하게 머무를 것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플랫폼은 시청각 매체에 한정된 형태로 제공되지만, 미래에는 미각, 촉각, 후각을 포함하여 오감을 완벽하게 구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디지털 공간에서 공짜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더 풍부한 컨텐츠를 제공하는 대가로, 오감에 대한 완벽한 통제권을 얻어 우리의 주의력을 빠짐없이 가져올 것이다. 동시에, 오감을 자극하는 광고는 사방에서 침투하여 우리의 생각과 욕망을 더욱 잡다하게 만든다. 이 순간부터 주의력은 더이상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행동마저 더는 우리의 소유가 아닐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은 디지털 플랫폼의 공동 소유이며, 우리는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다.

주의소유권 Attention Ownership

점차 심각해지는 주의소진 현상은 플랫폼 사용자와 제공자 사이의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플랫폼 제공자는 ‘맞춤형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사용자의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며, 체류 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개발한다. 이로써 그들은 사용자의 주의를 효과적으로 빼앗고 행동을 설계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사용자에게는 주의소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물론 사용자는 플랫폼 서비스의 사용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플랫폼 내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하여 이용할 수 있다. 문제는 사용자 입장에서 거대 플랫폼의 마땅한 대체재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서비스를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해서는 사용자에게 아주 약간의 선택권만이 주어져 있다. 원하는 정보를 선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의 유통 방식을 결정할 수는 없다.

자극의 홍수,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계획된 홍수는 사용자의 선택권을 무력화한다. 우리는 그 속을 허우적대며, 미리 설계된 물살의 방향대로 흘러간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스스로도 아주 책임이 없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그 플랫폼들은 이용하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 서비스를 원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로 선택한 것은 맞지만 꼭 그러한 방식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기를 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플랫폼 이용료로서 우리의 주의를 지급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또, 그들이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교묘하게 주의력을 마비시키는 것을 원하지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주의마비와 강탈의 문제가 심각해진 오늘날, 우리는 주의와 서비스를 맞바꾸는 거래 방식이 불공정한 거래는 아닐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애초에 그 거래가 우리의 인격과 인간다운 삶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주의력을 마비시키고 강탈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타당성을 원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소유권(attention ownership)을 주장한다. 우리는 주의의 소유자가 되어 주의 또는 주의력의 관리, 사용, 처분을 신중한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사유재산에 대해 갖는 권리와 대체로 유사하다. 그러나 ‘신중한 의사’라는 지점이 두 권리의 중요한 차이다. 사유재산과 주의 모두 강탈될 수 있지만 마비될 수 있는 것은 주의 뿐이고, 주의마비는 강탈을 더 용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을 소유하는 것과 주의를 소유하는 것 또한 의미가 다르다. 사유재산의 소유는 행위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의 소유를 능동적인 행위로서 정의한다. 주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신중한 의사에 따라 주의를 사용할 때, 그리고 오직 그런 경우에만 우리는 주의의 소유자가 ‘된다’. 이는 외부 자극 및 자기 자신에 대한 적절한 통제력이 전제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주의소유권은 내가 어떤 영향과 자극을 받을 것인지 숙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영향과 자극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고, 이 경향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오직 적절한 통제력을 갖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힘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재산권이 대단히 중요한 권리인 시대에, 주의소유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물건, 토지, 채권보다 더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주의는 정작 조금도 보호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유재산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위한 기초적 권리라면, 주의소유권은 더 광범위한 디지털 사회에서 자유를 위한 기초적 권리라고 생각한다. 치밀하게 설계된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부터 나의 행동을 낳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自由)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의소유권은 또다른 의미의 자유권이다.

앞서 말했듯, 주의소유권의 요청은 개인의 주의를 성역화하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비단 디지털 공간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영향과 자극에 우리의 주의를 할애한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선호할 수 있으며, SNS의 중독적 메커니즘을 수용하고자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무분별한 주의력의 소진으로 이어져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수준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기업의 수익 구조는 주의소유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의마비는 숙고를 방해하고, 주의강탈은 결정권을 침해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각종 플랫폼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모두 거부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한에서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극 제공자와 수용자 간의 힘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주의소유권의 보호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

근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다양한 권리의 발견과 창조였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인 자유권, 생명권, 평등권 등도 당연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으며 우리는 이름 모를 사투의 결과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매 시대마다 그 시대를 드러내는 권리가 존재한다. 각 시점과 환경 속에서 특징지어지는 불평등의 구조가 다르고, 공유하는 시대적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불평등을 인식하고, 공동의 시대 감각이 싹트기 시작할 때 우리는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새로운 권리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이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프라이버시(Privacy)’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작은 문제의식이 점점 공감대를 얻어 현대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꿰차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작업과 그 결과물로서 주장하는 주의소유권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발전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우리는 주의소진의 주범으로 플랫폼 기업을 지목하고, 그 이면에 있는 힘의 구조적 불균형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를 ‘모든 기업은 악마다’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여기지는 않기를 바란다. 기업은 본래 이윤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다만, 기업의 이윤 추구는 다른 사회적·인륜적 가치와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하며,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노력이 미비함을 지적한 것이다. 플랫폼(Platform)은 원래 기차를 타기 전 잠시 머물러가는 장소다. 디지털 플랫폼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쏟아지는 자극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원래 타려 했던 인생의 기차에 탑승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의소유권이 이런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의를 지불(Pay Attention)하지 않게 할 것을 기대한다.

개인별원고
디지털 플랫폼의 중독 메커니즘과 주의 소유권 장예준

내가 어린 시절 동경한 IT 기술은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과도 같았다. 78억 명의 사람들이 둥근 지구 위에 별처럼 반짝거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각각의 별들은 저마다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IT 기술은 연결을 통해 서로 다른 가능성들을 곱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IT 기술을 통해 인류는 사람들 사이에 잠들어 있던 창발성을 깨워냈다.

그러나, 오늘날의 IT 기업들은 목적 의식을 잃어버렸다. 통신 기술이 완성되면서 구글과 페이스북을 비롯한 플랫폼 기업들이 등장했다. 구글은 전세계에 펼쳐진 정보를 손끝 앞으로 데려와 주는 기술을 만들었고, 페이스북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기술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러나, 수익 창출이라는 명목 하에 그들의 철학은 무너졌고, 플랫폼 기업들은 더 이상 진정한 연결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용자들이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자신들의 플랫폼 안에 들어와 있기만 하면 수익이 저절로 창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연결을 혁신할 동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플랫폼 기업은 사용자를 플랫폼에 중독되게 한 다음 광고주가 원하는 행동을 설계하는 것에 집중한다. 구체적으로, 본 글에서는 플랫폼 기업들의 교묘한 주의소진 전략을 시기별로 나누어 기술적, 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나아가 현재의 수익 구조가 회사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규제 없이 기업이 변화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

Part 1. SNS 플랫폼 기업의 중독 전략: 변동비율 강화 계획

지금은 ‘메타’로 불리는 페이스북은 좋아요, 태깅, 뉴스피드를 내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사용자들이 인터넷 공간 속에서 좋아요를 통해 긍정적인 감정을 공유하고, 태깅을 통해 친구들과 상호작용하며, 뉴스피드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알릴 수 있음을 강조했다. 문제는 그들이 기업 성장을 빌미로 주의소유권의 침해를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변동비율 강화 계획을 통해 사용자들의 강박을 의도적으로 유발했다. 페이스북이 사용한 전략 좋아요, 태깅, 뉴스피드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공통점1. 자극에 반응할 시 보상 또는 처벌이 주어진다 (강화성)

공통점2. 보상 또는 처벌은 확률적으로 이루어진다 (변동성)

보상과 처벌이라는 말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보상은 긍정적 자극이고, 처벌은 부정적 자극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에 ‘좋아요’가 달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이기 때문에 보상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대보다 좋아요 개수가 적었고 이로 인해 기분 나쁜 느낌을 경험한다면 좋아요 기능을 통해 처벌을 경험할 수도 있다. 보상과 처벌 통해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것을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강화[3]라고 부른다.

하버드의 심리학과 교수였던 스키너는 실험 쥐의 사육 상자 안쪽에 생쥐가 누를 수 있는 레버를 설치하고, 생쥐가 레버를 누를 때마다 먹이를 주도록 기계를 만들었다. 며칠 밥을 굶은 생쥐는 우연히 레버를 누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버를 눌러 먹이를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 특정 행동으로 보상을 획득한 셈이다. 스키너 박사는 심심해졌는지 이 실험의 먹이 시스템에 약간의 장난을 쳐봤다. 레버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률성을 부여하여 레버를 여러 차례 눌렀을 때 그중 일부 경우에서만 먹이가 나오도록 실험 설계를 변경한 것이다. 보상에 확률성을 가미한 결과는 놀라웠다. 무작위적인 보상을 경험한 생쥐는 레버를 누르는 행동에 대해 심한 강박 증세를 보였다.[5] 심지어는 보상이 완전히 사라져도 결과에 무관하게 레버를 눌렀다. 이는 보상을 제거하자 학습된 행동도 함께 소멸했던 이전의 생쥐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

스키너의 실험에서와 같이, 보상에 확률성을 부여하여 학습을 유도하는 강화 계획을 변동비율 강화계획[6]이라고 부른다. 스키너의 실험에서 얻은 핵심 결과는 변동비율 강화 계획이 “보상과 처벌이 제거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소멸되지 않는 행동을 학습시킨다”[7] 는 것이다. 이제는 보이는가?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이유는 그 행동이 변동비율 강화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알림을 확인했기 때문에 태그 된 사진에 좋아요를 누를 확률이 생긴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시물들을 발견할 확률이 생긴다. 스마트폰을 확인한다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인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SNS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이 생산적이지도, 개인의 인간관계 발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작고 작은 확률로부터 얻는 자극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결코 놓을 수 없다. 개수를 알려주는 좋아요, 언제 언급될 지 모르는 태그, 무한 스크롤이 가능한 뉴스피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시작하는 단 한 번의 벨소리.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플랫폼의 수익 구조는 모두 주의소진 전략에 기반해 있다.

Part 2. 유튜브와 현대 숏폼 비디오 플랫폼의 중독 전략: 추천 시스템

지금까지는 SNS 플랫폼의 문제를 지적했다. 주된 내용은 알림 기능을 필두로 한 변동비율 강화 계획의 중독적 메커니즘이었다. 놀랍게도, 오늘날 알림은 중독 전략으로서 이미 퇴색된 지 오래다. 사람들은 시도때도 없이 날아오는 알림이 얼마나 귀찮은 지 인지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드로이드와 iOS 모두 앱에서 알림을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선보였다. 이제는 중요한 알림만 선별해서 보내주기 위해 플랫폼 기업에서 발 벗고 나섰다.

참… 웃기는 일이다.

플랫폼 기업들이 더 이상 알림을 보내는데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알림을 보내지 않아도 알아서, 제 발로 플랫폼에 찾아 들어오기 시작한 까닭이다. 2020년 8월 유튜브가 구독한 영상에 대한 이메일 알림 기능을 제거한 근거는 “실험 결과 이메일 알림 전송이 시청 시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8] 현대 플랫폼 기업의 목표는 사용자 수를 최대화하는 것이 아닌, 플랫폼에 습관적으로 걸어 들어온 사용자를 최대한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새로운 영상들을 추천하는 구글의 자동화 시스템을 사람들은 줄여서 ‘알고리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유튜브 영상 중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영상을 알고리즘이 제어하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영상이 대박이 나기를 ‘알고리즘님’께 빌기 시작했다.

  • 유튜브 캡쳐1
  • 유튜브 캡쳐2

신격화된 유튜브 알고리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공지능 학계에서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추천 시스템(Recommendation System)이라고 부른다. 추천 시스템은 단어 그대로 사용자가 플랫폼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컨텐츠를 추천하는 역할을 한다.

추천 시스템이 동작하는 원리는 우리가 샤워를 하기 전 최적의 물 온도를 찾는 것과도 비슷하다.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위 아래로 조절하면 수압(x)을 맞출 수 있고, 양 옆으로 조절하면 온도(y)를 맞출 수 있다. 사람은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돌려가면서 (x, y)를 조절하고, 결과적으로 가장 “행복한” 샤워 셋업을 만든다. 수도꼭지 손잡이를 돌리듯, 추천 시스템도 플랫폼 내에서의 사용자 경험을 조절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제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첫 화면에 뜨는 동영상의 목록, 검색 시 가장 먼저 뜨는 동영상, 심지어는 댓글 창에서 먼저 보이는 댓글도 모두 유튜브 알고리즘이 사용자 맞춤형으로 보여주는 결과들이다.[9] 물 온도를 바꾸면 사람의 행복감이 늘어나고 줄어들듯이, 플랫폼의 여러 변수를 바꾸면 사용자들의 행동 양상이 변화한다.

사람은 샤워 손잡이를 돌릴 때 자신의 만족도를 최대화한다. 그렇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용자 만족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안타깝지만, 광고로 수익을 내는 구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자 만족도가 아닌 시청 시간이다. 이 사실은 유튜브 알고리즘의 효과를 보고하는 구글 엔지니어들의 자체 논문을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Covington et al., 2016).[10] 해당 논문에서는 새로 제시된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적용했을 때 “사용자의 시청 시간이 드라마틱하게 길어지는 것을 확인했다”고 언급한다. 과연 그 성능 개선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현대의 추천 시스템은 다음 원리로 사용자의 시청 시간을 최대화한다. 첫째, 사용자 임베딩(user embedding) 과정에서 사용자의 유튜브 시청 성향이 함축적인 기계어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 과정에서 유튜브 시청 기록과 검색 기록만이 아니라, 위치/성별/나이/로그인 데이터를 아우르는 거의 모든 정보가 활용된다. 둘째, 사용자가 영상을 클릭할 확률, 그리고 클릭했을 시의 기대 시청 시간을 모델링을 통해 예측한다. 마지막으로, 추천 시스템은 클릭 확률과 시청 시간을 최대화하는 동영상을 추천 목록의 최상단에 위치시킨다. 유튜브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인간의 새로운 모습은 나약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최신 기계학습 기술로 무장한 추천 시스템을 통해 구현된 것에 가깝다.

앞서 스키너 실험의 결과 변동비율 강화 계획이 단순히 보상에 무작위성을 가미한 것만으로도 강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추천 시스템이 그것보다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사용자들의 행동 양상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스키너는 무작위적으로 보상을 주고 뺏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보상의 강도와 종류를 자유자재로 변경할 수 있는 신개념 스키너 상자에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다. 강하게 말하자면, 추천 시스템은 시청 시간을 최대화하는 조련사다.

Part 3. 플랫폼 기업이 주의소진 전략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나는 뜨거운 샤워를 좋아해서 항상 수도꼭지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린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 업체에서 뜨거운 물을 100°C로 공급한다면, 나는 반발할 것이다. 샤워를 하면서 행복해지기를 바랐지, 무조건 물 온도가 뜨겁기를 바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의 시청 시간을 최대화하려는 기업과 이에 반발하는 사회도 같은 구도에 놓여 있다. 추천 시스템은 인간의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 목표도 인간이 설정한다. 이를테면, 사용자의 만족도를 최대화하는 추천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광고가 주 수입원인 플랫폼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동기가 없다. 그러니 이 현상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플랫폼 기업의 욕망이 사회의 편익과 충돌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비물질적인 서비스에 대해서 지불하는 금전적 비용이 주의소유권을 간접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OTT 플랫폼 기업 넷플릭스는 사용자들로부터 구독료를 받았기 때문에 사용자 만족도에 기반한 추천 시스템을 개발하고 적용할 수 있었다.[11] 또한 ‘광고 없는’ 플랫폼 사업을 꿈 꿀 수 있었고, 양질의 컨텐츠 제작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최근 구독자 수 감소로 인한 주가 폭락 이후 광고 없음 전략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탈피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를 광고에 활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브리저튼’[12] 과 ‘이상한 이야기’[13]를 삼성전자 광고에 내보냈으며, 스냅챗 출신 광고 전문가 두 명을 영입하고 ‘광고 보면 반값’ 서비스의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14]

그렇다면, 역으로 주의소진의 문제는 사실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했던 소비자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사용자들이 서비스 비용에 상응하는 금액을 각 플랫폼 기업에 지불하더라도 기업에서 주의소진 전략을 폐기할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주의와 돈을 모두 뺏긴 일방적인 피해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광고 없음’을 지지해줄 만한 기반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맞춤형 기술의 발전에 따라 광고의 수익성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디지털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소비자들이 금액을 지불하더라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서비스는 시장에서 도태되기 때문에 플랫폼에 머물도록 유도하기 위한 주의소진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플랫폼 기업이 스스로 주의소진 전략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주의소진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구글, 메타 등의 거대 플랫폼 기업과 광고 없음 전략을 결국 폐기하고 주의소진 전략을 수용한 넷플릭스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주의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규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기업의 수익 구조가 무엇이든 간에, 수억 명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플랫폼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면 기업들은 걸맞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용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자정해나가는 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이유로 기업에게 실질적인 자정 능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상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제는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규제는 주의소유권을 내세운, 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탄압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비자들 역시도 기업에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 무한한 혜택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비스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의소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문제를 공론화하고, 합의 가능한 제도적 장치를 정치계와 기업이 의논해야 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다음 문장을 기억하자.

“If you’re not paying for the product, then you are the product.”[15]

“제품에 대한 돈을 내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제품입니다.”

내가 주의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유 이용우

최근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의소유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사람들은 이미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우리가 주의소진이라 부른 문제적 현상에 공감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분분했다. 특히, 주의 또는 주의력에 대한 모종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생각은 꽤 많은 설득을 요했고, 설득이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권리 주장이 주는 생경한 느낌, 기술 발전과 기업 활동에 무리한 족쇄를 거는 듯한 느낌, 괜히 너무 유난 떠는 느낌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주의소유‘권’을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주의 또는 주의력은 오늘날 보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인지 기능의 저하 때문만이 아니다. 집중 시간(attention span)의 감소, 결정을 못하는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 등은 이미 해묵은 문제이지만, 이러한 인지 능력의 범사회적 저하가 어떤 새로운 권리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인지 기능의 저하와 함께, 또는 그 이면에서, 실제 우리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온종일 SNS나 유튜브를 본 사람들은 멍해지는 걸 넘어 ‘현타’가 온다고 한다. 즉, 그들은 어떤 공허함, 의미의 결여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의 소진은 인지적 관점이 아닌 삶 전반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윤리적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이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주의소진의 문제점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공허함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의 잠재적인 위험성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의식이 적확하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결정할 수는 없어도 통제할 수는 있다

사실 ‘주의소유권’이라는 아이디어의 최초 형태는 ‘광고를 보지 않을 권리’(ad-free rights)였다. 나는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광고들이 불쾌했고, 또 한편으로 두려웠다. 우리는 우리가 광고에 대해 대체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기업들이 ‘효과적인’ 광고를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지, 어떻게 하면 원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머릿속에 ‘심을’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래서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을 모델로 쓰고,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영상의 끝에 브랜드 로고를 노출하는 엉뚱한 광고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의도된 생각이나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일 사실이 이러하다면, 오늘날의 수많은 광고들은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욕망들을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광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의를 강탈하는 수많은 것들, 우리가 ‘홍수’라 부르는 디지털 공간의 불필요한 자극들 역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할 수 있고,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돌이켜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좋아하기로 결심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좋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오히려 좋고 싫음을 결심에 의해 결정한다면, 그것은 진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은 ‘빠지는 것’이고, 누군가를 ‘이유 없이’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정할 수 없음이 좋고 싫음의 본질이다.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의 힘은 실로 크다. 좋고 싫음은 욕망과 바람, 행동으로 이어져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좋고 싫음은 우리가 겪는 여러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좋은 것들이 서로 상충할 때,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해야만 할 때, 또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를 때 우리는 고민에 부딪히고 괴로워한다. 만약 이처럼 중요한 문제가 그 본질상 우리의 자의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실로 외부 자극에 취약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이 꼭 그렇지는 않다. 좋고 싫음의 형성이 비록 우리의 결정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우연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은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환경 보호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일회용품 사용을 권장하게 되지는 않는다. 즉, 좋고 싫음을 결정할 수는 없더라도 개인의 정체성이 이를 통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의소진이 오늘날 정체성의 위기를 촉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위기

중요한 것일수록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이 걸린 결정을 하룻밤에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신념과 가치관은 오랜 숙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것 같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디지털 사회의 새로운 이상이 “개성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16] 모든 것들이 빠르게 유통되고 변화하는 디지털 사회에 적합한 주체는 개성 없는 군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개성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측면에서 견고하고 일관된 사람임을 뜻한다. 디지털 공간의 홍수는 바로 이러한 견고함과 대립한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자극에 발맞춰 우리는 시시각각 새로운 욕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게시물과 ‘좋아요’, 동영상 플랫폼에 올라오는 브이로그는 매일매일 새롭게 쏟아지면서 시대의 욕망을 설계한다. 광고들은 이러한 시대 욕망에 빌붙어 모든 욕망의 실현을 소비로 끌어온다. 이상적인 디지털 주체는 이 모든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길 뿐이다. 흐름에 저항하고 버틸 수 있는 견고함이 그에게는 없다. 물에는 고정된 본성이 없다는 옛말처럼, 유체가 된 주체에게는 개성이 없다.

몰개성한 것과 욕망이 다양한 것은 다르다. 다양한 욕망에 대해 어떤 일관된 태도가 부재하는 것이 몰개성한 것이다. 다양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과 아무거나 좋아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일관된 태도, 즉 우리가 정체성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견고함이 점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극의 홍수는 견고함을 형성할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욕망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에 새로운 욕망이 들이닥치기에 우리에게는 단단해질 시간이 없다. 와이어드(Wired)의 편집장이자 미래 기술 전문가인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유체성(liquidity)이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17] 즉, 오늘날 많은 것들이 유연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이 흐름은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은 유체는 생산적이기보다 파괴적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압도하고, 깎아내며, 무질서하게 떠밀어간다. 우리는 이미 그 무질서를 체감하고 있다. 신념, 가치관, 생활 양식은 그저 철마다 바뀌는 패션이 됐다. 무언가를 뽐내는 사람은 많지만,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은 드물다. 개인은 그저 무질서한 욕망의 다발이 되어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체성의 위기는 좋고 싫음의 문제에 대해 점점 우리가 통제력을 잃어간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라는 개념이 모호해짐에 따라, 좋고 싫음의 형성이 ‘나’와 맺는 관계도 빈약해지는 것이다. 이 공백을 꿰차고 들어서는 것이 바로 쾌락이다. 쾌락은 그것이 중요해서라기보다, 쾌락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마음에 든다. 즉, 쾌락은 어떠한 정당화나 의미 없이도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속성 때문에 쾌락은 쉽게 사그라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쾌락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오늘날 디지털 공간의 홍수는 바로 이러한 쾌락의 한계를 완벽하게 메꾸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쾌락의 통치에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어준다. 쾌락의 지휘 아래, 좋고 싫음의 유통기한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다가 질리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반복되지만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 연관도 없다. 마치 ‘숏폼 콘텐츠’와 같이, 즐기고, 넘기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개성도, 정체성도 없고, 그저 짧고 자극적인 쾌락만이 있을 뿐이다. 쾌락이 사그라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쾌락의 덧없음이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래서, 주의소유권

앞서 주의소진이 정체성의 위기를 촉발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언뜻 보면 오늘날 정체성의 위기를 촉발한 것은 주의소진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처럼 보인다. 효율성의 극대화와 소비주의 같은 경제 논리의 확산,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닐까? 이러한 지적은 분명 타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주의소진과 정체성의 위기를 촉발했다는 주장과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정체성의 문제가 거대한 경제 시스템과 개인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면, 주의소진은 그 최전선에서 개인이 겪는 피해이기 때문이다. 즉,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주의라는 방어선을 무너뜨리면서 시작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디지털 공간은 상업 공간이고, 점점 많은 상업 공간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공간의 확장은 곧 상업 공간의 확장을 의미하고, 우리는 이곳에서 주의소진의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미래의 디지털 공간은 더 확실하게 우리의 주의를 소진시킬 것으로 예상되며, 경제 논리는 개인의 더 내밀한 영역까지 점령해 나갈 것이다.

전세를 뒤집고 싶다면 우리는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소유권에 기대하는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개인의 신중한 의사 판단과 주의력을 보호하여 본인의 삶을 자유롭게 이끌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양에서 넘어온 ‘Liberty’의 의미가 아닌, 자유(自由) 개념이 본래 가졌던 의미는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음’이다. 즉 어떤 바깥의 대상이 아닌 내가 나의 행동과 심적 상태의 원인이 될 때,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 같은 맥락에서, 견고한 정체성 또는 개성은 자유의 필요 조건이다. 우리의 좋고 싫음의 형성이 정체성에 의해 적절히 통제될 때에만 우리는 스스로 좋고 싫음의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의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권리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시대 상황에 맞추어 기존의 자유권을 새롭게 해석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해석에 공감하는 누구든 주의소유권을 주장하고, 보호할 수 있다. 개인을 비롯해 정부, 기업, 시민사회 등 실로 누구든 말이다. 작은 문제의식이 모여 새로운 시대 감각이 되고, 새로운 시대 감각은 미래의 삶을 새롭게 정초할 것이다. 여기에 주의소유권이 있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공간, 메타버스, 플랫포니아 김준태 새로운 공간

인간은 오랜 시간 하나의 공간 안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컴퓨터의 발명과 인터넷의 개발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인 디지털 공간이 열렸다. 기술의 발전으로 최근에는 디지털 공간의 발전된 형태인 메타버스에 관한 담론이 쏟아지고, 메타버스를 준비하는 기업에는 많은 돈이 투자되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메타버스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그만큼 메타버스의 앞길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있고 진정 우리가 바라는 미래로 가기 위해선 끝없는 상상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러한 상상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공간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자연공간, 디지털 공간, 메타버스, 또 이 글에서 새롭게 제시할 인공공간 등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공간을 여러 층위에서 나누어 분석한다. 이후 ‘플랫포니아’라는 개념을 통해 방황하는 인간들의 거주지로 자리잡는 인공공간의 한 디스토피아적 형태에 대해 알아본다. 최종적으로 전체적인 내용은 앞서 우리가 말했던 이야기들의 정리이자 반복이 될 것이다. 또 이 글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메타버스를 상상하고 분석하는 글이기 때문에 앞으로 제시될 내용들이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언급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로부터 여러 새로운 생각과 고민이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

메타버스
  • 도식 1[도식1]

공간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하자. 최대한 폭넓게 정의하면 공간은 가능성을 보장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공간은 이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매 순간 공간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의 경험에서 봤을 때, 공간이란 인간에게 보고,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는 등의 생활가능성을 보장하는 곳이다. 사실 너무 많은 일들이 인간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논의를 위한 최소의 기본 조건들을 추려보자면 그것들은 감각, 의사소통, 활동성에 있다고 생각한다.[18] 따라서 분해해서 이해하면 공간이란, 감각적 경험이 가능한 1차공간,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2차공간,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3차공간이 존재하며 앞으로 이 3가지 공간이 동시에 충족되는 경우를 완전공간이라고 부르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 물질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완전공간을 자연공간이라고 부르겠다. 이로부터 매 생활 속에서 막연하게 받아들였던 공간은 우리의 논의 아래에서 자연공간으로 말해짐을 알 수 있다. 추가적으로 우리는 분해된 각각의 공간들을 독립적으로 상상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속의 공간은 우리가 시청각적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지만 그 공간의 사람과 소통할 수 없고 내가 직접 활동할 수도 없는 공간이기에 1차공간이다. 메신저에서의 타인과의 소통은 의사소통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독립된 2차공간이다. 마지막으로 VR기기를 이용해 어떤 공간 속에서 나의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3차공간이 될 것이다.

메타버스디지털 완전공간이다. 디지털 공간은 말 그대로 디지털이라는 형식 하에서 발생되는 공간이다. 디지털 공간은 컴퓨터라는 물질에서 발생되지만 오직 논리적 규칙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물질의 규칙을 받지 않는다. 바로 이런 디지털 공간 위에 완전공간이 들어선 형식이 메타버스다. 사실 초보적인 형태의 메타버스를 우린 이미 경험할 수 있는데 바로 온라인 게임을 통해서이다. 온라인 게임은 시청각적으로 게임 내 세상을 감각하게 하며(1차공간) 텍스트 메시지 또는 음성 메시지 기능을 이용하여 다른 이용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2차공간). 마지막으로 나의 캐릭터는 키보드 방향키 움직임에 따라 활동성을 부여받는다(3차공간).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메타버스는 지금 수준의 온라인 게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온라인 게임에서 구현되는 각각의 분해공간들은 극히 초보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다. 우리 머릿속에 어렴풋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메타버스는 이 분해공간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과정의 극한에 놓여있다. 만약 디지털 공간에서 1차공간이 완전한 오감을 전달하고, 2차공간은 지연 없는 안정적인 소통을 보장하며, 동시에 3차공간이 나의 신체적 활동성을 온전히 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메타버스다. 그리고 인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단계에 가깝게 도달할 것으로 믿는다.

자연공간과 디지털 공간
  • 도식 2[도식2]

메타버스는 디지털 공간 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디지털 공간의 특성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메타버스에 대한 깊은 이해는 디지털 공간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며, 그에 따라 이 절에서는 디지털 공간의 고유한 몇 가지 특성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다만 먼저 자연공간을 기준으로 특성들을 제시하고 디지털 공간은 그것의 반대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설명하겠다. 자연공간의 주요한 세가지 특성은 잠재성, 물질성, 휘발성이다.

먼저 자연공간의 잠재성을 우연성 개념과 비교하여 이해해보자. 잘 섞인 트럼프 카드에서 한 장을 뽑았을 때 스페이드 에이스가 나오는 것은 우연성의 영역이다. 하지만 지구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나무 종을 발견하는 것은 잠재성의 영역이다. 좀더 형식적으로 설명하면 우연성은 확률론을 통해 수학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다. 즉, 우연성은 표본공간[19]과 각각의 사건들에 부여되는 확률 개념으로 완전히 설명된다. 하지만 확률론적 접근의 큰 맹점은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세계는 표본공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연성과 대비되는 잠재성 개념이 등장하는데, 바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표본공간의 불완전성이 잠재성이다. 우연성은 확률적 기교를 통해 쉽게 프로그래밍 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디지털 공간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잠재성은 원천적으로 컴퓨터 내에서 불가능한 개념이며 따라서 디지털 공간에서는 표본공간이 정해진 우연적 사건들은 존재하지만 잠재적 사건들은 발생할 수 없다.

두번째 자연공간의 특성은 물질성이다. 자연공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자연과학은 이러한 물질들의 특성과 규칙들을 밝혀낸다. 물질세계의 규칙들이 결과적으로 유한한지 또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규칙들을 밝혀낼 수 있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밝혀진 여러 이론들이 물질계를 강력히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런 물질계의 규칙들은 우리를 구속하지만 동시에 신비로움을 간직하며 인간에게 끝없는 지적도전을 요구한다. 반대로 디지털 공간은 선천적으로 비-물질적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디지털 공간을 지탱해주는 컴퓨터는 물질이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은 순전히 컴퓨터 내의 논리적 규칙들로 이루어진 비-물질적 공간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현실적인 물리엔진을 적용시킨다면 물질세계를 최대한 모사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디지털 공간의 물질성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쉽게 말하면 한마디로 비-물질적인 디지털 공간에서는 마법이 가능하다. 마법이란 물질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대상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이상적인 메타버스에 몇 가지 기능을 추가해서 ‘해리포터’와 같은 세계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일이고 디지털 공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이다.

마지막으로 자연공간은 강한 휘발성을 가진다. 자연공간에서 발생하는 순간들 대부분은 저장될 수 없다. 물론 사진이나 동영상 또는 글을 통해 일부 영역들을 기록하여 저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담아낼 수 있는 정보량이나 내용의 객관성 측면에서 매우 불완전한 저장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관점을 가지고 기록을 하고 이 과정에서 항상 편향과 왜곡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정보의 완전한 복제와 저장을 가능하게 하며 원한다면 디지털 공간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그 모습 그대로 저장시킬 수 있다. 저장의 이유는 결국 활용에 있다. 완전한 저장은 그만큼 해당 정보의 활용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며 여러 부분적인 분석 또 대표적으로는 개인의 행동을 파악하는데 풍성한 자원이 될 것이다.

인공공간과 플랫포니아

인공공간은 인간이 설계하고 만들어낸 공간이다. 하지만 자연공간에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다. <도식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공공간은 디지털공간 전부와 자연공간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공간에 존재하는 건물이나 넓게는 계획도시 같은 경우도 인공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공공간 개념을 제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개념 위에서 비로소 공간에 대한 인간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해석은 사회문화적, 윤리적, 경제적, 법적인 해석을 모두 포함한다.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인공공간이 설계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또는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설계과정에서 의도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순전히 기업의 이윤극대화의 관점에서 공간이 설계되는 경우도 많다. 대형마트의 구조와 물건들의 배치가 어떻게 우리들의 주의를 빼앗고 더 오랜 시간을 공간에 머물게 하려는지 알고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드디어 플랫포니아를 설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플랫포니아‘도시가 된 승강장’의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해 새로 고안한 단어로, 플랫폼 기업들이 인공공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종류의 디스토피아다. 원래 승강장은 일시적이며 목적이 뚜렷한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단지나 매점이 눈길을 사로잡아도 주의를 놓치지 않고 기차에 올라탈 수 있다. 반대로 도시는 거주가 가능한 장기적 공간이며 목적도 다양하고 불분명하다. 따라서 ‘도시가 된 승강장’은 일시적이고 목적이 뚜렷해야 하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의미 없는 장기체류를 하면서 삶의 방향성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그린다.

사실 자연공간과 디지털 공간 모두 플랫포니아의 발생가능성이 존재한다. 가령 ‘스타필드’나 ‘더현대’의 모습에서 자연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플랫포니아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목적을 가지고 해당 공간을 방문한다. 맛집 방문이나 영화관람 등이 본래의 목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거대한 공간을 걷다 보면 순전히 우리가 원했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공간의 구조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계속 구경하며 건물을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공간 내에 진정한 플랫포니아가 등장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공간은 물질적 한계 안에 있고 따라서 크고 복잡한 건물과 그 안의 가게들도 언젠가는 본인에게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연공간에서 플랫포니아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성은 크지 않다.

디지털 공간에서 플랫포니아의 발생가능성은 훨씬 크고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 이유를 우리가 2절에서 살펴본 자연공간과 대비되는 디지털 공간의 특성에서 찾아보자. 먼저 디지털 공간은 비-잠재적이지만 쉽게 우연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바로 비-잠재적인 우연성은 카지노와 같은 도박 시스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지도 모르는 대상을 찾기 보다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소수의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열광한다. 이러한 심리를 이용해 디지털 공간은 이용자들을 중독시킨다. 다음으로 디지털 공간의 비-물질성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새롭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생산하여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며 자신도 모르게 계속 디지털 공간을 배회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비-휘발적인, 즉 중요한 정보들이 모두 저장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은 모든 상업적 전략을 각각의 개인에게 특화시킬 수 있다. 이미 우리가 만들어내는 디지털 흔적들은 최적화된 광고를 위해 매 순간 활용되면서 개인의 주의력을 뺏고 있다. 정리하면 플랫폼 기업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공간의 특성들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플랫포니아가 세워진다.

인스타그램 같은 경우는 위에서 말한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주며 해당 플랫폼 위에서 확실히 플랫포니아가 건설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인스타그램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하는 행동은 아래로 끌어당겨서 피드나 탐색창을 새로고침하는 일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우연성 메커니즘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어떤 새로운 탐색창이 나오고 내가 관심있는 내용이 나올지 궁금해하면서 사실상 목적없는 당기기를 반복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탐색창과 피드는 화려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판타지 같은 이미지는 아니지만 분명 내가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미지들로 나의 시각을 자극할 때도 있고 혹은 감각적인 사진이나 영상으로 나의 시선을 빼앗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으로 또 아마도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의 정보를 활용해 나에게 유용한 듯한 광고를 끊임없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본인은 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종합했을 때 우리는 너무 쉽게 목적없이 해당 공간에 오랫동안 갇혀서 방황하게 된다. “세계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공유하자(Capturing and sharing the world’s moments)” 인스타그램의 초창기 모토다. 전 세계의 사람들과 사진을 공유하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가 순간을 포착할 시간마저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스타그램은 기존의 목적을 잃었으며 그저 정처없이 방황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디지털 완전공간인 메타버스에서 상황은 더 복잡하고 심각해진다. 이미 위에서 온라인 게임이 메타버스의 초보적인 형태라고 언급했다. 우리는 온라인 게임이 강한 중독성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를 즐기는 사람들로부터 수익을 만들어내는 사업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기존의 온라인 게임은 플랫폼의 형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상적인 메타버스에 다가갈 수록 기업들은 닫혀 있는 게임의 형식이 아닌 플랫폼의 형식이지만 게임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형태로 메타버스를 구성할 것이다. 위에서 계속 언급한 디지털 공간의 비-잠재성, 비-물질성, 비-휘발성이 이상적인 메타버스에서의 완벽한 감각, 완전한 소통, 직접적인 활동성과 결합하여 얼마나 교묘한 형태로 개인의 주의력을 무너뜨리며 방황하게 만들지 우리 각자는 계속해서 상상하며 대비해야 한다.

메타버스와 미래

앞서 말했지만 플랫포니아의 발전은 메타버스를 앞두고 있는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하는 대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 대한 주요한 대비책으로 앞서 주의소유권을 주장했다. 주의소유권이 잘 정립된 미래라면 메타버스가 꼭 우울한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타버스와 자연공간은 서로에게 훌륭한 보완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자연공간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와 마법 같은 경험을 메타버스에서는 현실처럼 즐길 수 있다. 또 물리적인 경계를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생활환경을 뒤바꿀 것이다. 반대쪽에서 바라봤을 때 메타버스는 자연공간의 신비로움을 선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화려하지만 비-잠재적인 메타버스에서 인간은 온전히 새로운 것은 찾을 수 없으며 그렇기에 결국 메타버스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물질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 더 뚜렷해지며, 우리의 육체가 숨쉬고 있는 자연공간은 메타버스에서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잠재성이라는 놀라움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올 것이다.

주의소유권 과연 꼭 필요한가? 강연준

여기까지 도달한 독자들은 책에서 주장하는 ‘주의소유권’이라는 권리가 신선하게 느껴지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책을 읽는 내내 끄덕이면서 읽지 않았을까? 소수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주의소유권’에 대해 반대하고 순진한 대학(원)생들의 생각이라고 여기고 힘들게 페이지를 넘겨온 독자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라면 [주의소유권 과연 꼭 필요한가?]를 조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1) 과연 플랫폼 기업의 문제일까?

현대사회와 기술의 발전은 긍정적인 효과를 많이 만들어왔다. 플랫폼 기업의 알고리즘과 맟춤형 광고는 이런 기술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시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방 안에 앉아,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중국 상하이 봉쇄나 홍콩 시위의 현장의 목소리를 현지인들이 올린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맞춤형 광고의 효과는 더욱 놀랍다. 단순히 컴퓨터를 검색했을 뿐인데, 평소에 알지도 못했던 휴대용 컴퓨터 받침대나, 휴대용 키보드 등을 추천해준다. 예전에는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한 다음, 비슷한 장소를 몇 시간을 돌아야 찾을 수 있던 것들인데 참 경제적이다. 필자는 이런 기술의 발전이 늘 반갑고 좋았다.

이런 필자의 삶에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다. 주의소유권이라는 개념 만드는 회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다들 플랫폼 기업이 우리의 주의를 소진한다는 문제 의식과, 주의소유권(내가 어떤 자극을 받을 것인지 숙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앞으로 오감을 동원할 수 있는 메타버스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한다. 참 이상했다. 엄청나게 편리하고 안전한 플랫폼 기업을 비판하다니. 오감이 동원되는 메타버스 시대에는 오히려 방안에서 더 현장감이 있는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필자가 아는 한 인간은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주의를 소유해 본 적도.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산적도 없다. 예시는 차고 넘친다. 과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에는 마을의 여론과 종교적 메시지가 사람들의 사고와 주의를 지배해 왔다. 굳이 중세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독자들도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모와 사회 그리고 국가의 교육에 의해 ‘한국인’이 되어간다. 이런 자연적인 환경은 장기간에 걸쳐 한 개인의 이익이나, 생각과는 별개로 이런 요소들은 주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어간다.

주의력 소진 현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런 현상이 플랫폼 기업만의 고유한 현상일까? 사람들의 주의력 소진과 주의력 문제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기술의 발달로 “SNS플랫폼 기업”이 생겨나기 전에도 존재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하더라도 길거리에는 옥외광고와 팸플랫이 가득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방송사와 기업들은 아주 교묘한 형태로 광고를 만들어 우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왔다. 스마트폰과 SNS의 등장은 공간의 변화를 의미할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플랫폼 기업’을 겨냥해 주의소유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플랫폼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것 같았다.

2) 나만의 나침반

의문은 곧 강력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원고를 작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플랫폼 기업에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기술 자체는 중립적인 것 같다.
결국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주의소유권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나를 설득해 달라”

동료들은 다양한 논리와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만의 나침반’이라는 개념은 비슷한 내용의 질문을 계속해서 쏟아내지 않게 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잠시 소개하자면, 나만의 나침반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추구하는 목적을 의미하며,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닌 엄청난 노력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2) 미래 지향적이며 확실한 선호 체계가 잡혀 있다. 3) 이 나침반은 플랫폼 기업의 알고리즘과 주의소진 전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보호도구이다. 필자의 경우는 이런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은 오늘날 내가 소속된 부모님과 동생으로 구성된 가족과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미래의 아내와 자식들이다. 하지만, 토론에 임할 당시에는 이 같은 말로도 완벽히 설득되지는 않았다.

완벽히 설득되지 않았기에 집에 돌아와 원고를 작성하기 전,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먼저 나만의 나침반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나침반은 길을 잃지 않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도구이다. 나만의 나침반이란 스스로 정한 방향을 안내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정말 나만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1) 사회에서 제시해주는 기준과 가치보다 자신이 세운 기준과 가치, 방법을 수용하는 편인가와 2) 수용하더라도 지난한 숙고의 과정을 거쳤는가 라는 기준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전제로 다시 플랫폼 기업과 나, 그리고 나침반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정말 나의 주의를 완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전에 우연한 클릭 한 번으로 밤을 새워 본 적이 있다. 처음 한두 시간은 정말 행복했고, 세 시, 네 시가 되면 슬슬 다음날이 걱정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열심히 산 하루를 보상받기 위해, ‘안전하게 방안에서 세상보기’를 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또한, 아침에 드는 잠과 함께 모든 것은 리셋 되어 주의는 다시 내 소유가 되었다.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자는 큰 목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니 아주 가끔 일 년에 한 번 꼴로 주의를 완전히 빼앗긴 적도 있었다. 우연한 클릭 한 번으로 알고리즘에 도배된 ‘사랑과 전쟁’, ‘실제상황’ ‘애로부부’등의 영상을 계속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실제로는 보거나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막장 예능 속의 상황이 일상에 너무나도 쉽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유튜브에 나오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브이로그(V-log)와 파티 영상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때 면, 미래를 위해 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하루가 보잘것없이 느껴진 적도 있었다. 그럴 때 면 세상의 기준대로, 알고리즘이 주입하는 대로 살아가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이런 순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가끔 일어났던 이유는 스스로가 주의마비에 빠지고 있다고 인지하는 즉시, 해당 채널 추천 거부 기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나만의 나침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인생의 나침반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성공하는 길에 1,000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나만의 나침반을 만드는 길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스스로의 경우에만 국한하고 보자면, 환경이 제일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90년대 스마트폰이나 플랫폼 기업이 생기기 전에 태어났다. 애초에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지 않았기에 시작부터 스스로 고민하고 많은 생각을 하기에 조금 더 유리한 시작점에 있었다. 여기에 우리 집은 조금 더 특수했다. 2000년대 초반 바보상자 붐이 불 때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없애 버렸고, 컴퓨터 사용은 주말에 2시간씩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필자는 시대와 어머니가 만들어 준 환경 속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텔레비전 광고와 정보로부터 떨어져 스스로 고민하고 사색할 시간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아주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필자의 방법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쉽게 시험의 성적의 예시를 들 수 있다. 성적을 잘 받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많은 시간을 책상에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책상에서 어떻게 보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책상에서 앉아있는 사람이 핸드폰만 봤다면 결코 높은 성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환경은 최소한의 조건이었을 뿐, 개인의 부단한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나만의 나침반을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 다시 주의소유권…

이제 도입부에서 했던 말을 180도 뒤집어 주의 소유권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해보고자 한다. 주의소유권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자신만의 나침반을 만들 최소한의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는 나만의 나침반이 플랫폼 기업의 알고리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기능적인 측면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만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인생의 방향성,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의미하는 나만의 나침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 번 생각해봐라,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얻어낸 어떤 답에 의해 살아가는 나의 삶을 살고 싶은지? 아니면, 그냥 사회에서 혹은 매체에서 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은지 말이다.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더라도 전자의 무게감이 후자의 무게감보다 클 것이다. ‘주의소유권’의 도입은 삶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 시간을 보장하는 데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주의소유권이 필요한 이유는 10년 뒤, 어쩌면 그 후의 세상은 지금까지 와는 차원이 다른 오감을 자극하는 시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은 정보의 홍수와 노이즈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텔레비전은 집안에만 존재했을 뿐, 가지로 다닐 수 없어 물리적으로 분리된 상태였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프로그램 역시 사람 하나하나의 취향과 기호에 맞춰 큐레이팅이 되는 형식이기보다, 전 연령대가 같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기에, 중독성 역시 높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바뀐 지 오래다. 스티브 잡스의 발명품인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정보에 지속해서 노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 처음 노출되는 연령 역시 낮아졌다. 이는 나만의 나침반을 만들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10년 뒤에는 과연 어떨까? 도입부에서는 오감을 자극하는 새로운 콘텐츠, 오감을 자극하는 광고를 통해 얻는 효용 등에 대해 다소 낙관적으로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필자보다도 더 확고하고 더 정교한 나침반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시대에 더 큰 효용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최소한의 스스로 지킬 권리나 도구 없이, 10년 동안 더 많은 데이터를 통해 정교화된 알고리즘과 다른 감각을 메타버스 플랫폼 기업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만약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을 단순히 해당 채널 추천 금지’와 같은 단순한 클릭 막을 수 있는 오늘날과 다르게, ‘후각+촉각’의 조합의 어떤 기능이 해당 영상을 끝까지 시청하게 만든다면? 그 자극이 너무 미묘해 우리도 알아채지 못해 더 이상 우리의 의지가 아닌 기업의 의지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어떨까? 극단적이면서 비관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의 지난 역사를 보면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문명과 질서, 평화 등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핵무기, 마약, 전쟁 등 해로운 것 역시 인간의 손에서 탄생했다.

4) 성찰

지금까지 필자가 동료들에 의해 또, 스스로에 의해 설득되는 과정을 소개했다. 전달을 용이하기 하기 위해 단어를 몇 개 바꾸긴 했지만, 최대한 실제로 있었던 대화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다. 전술한 것처럼 필자는 처음에 그 누구보다 ‘주의소유권’ 개념에 반대했다. 하지만 2박 3일의 토론 기간과 약 한 달 간의 집필 과정이 끝난 지금, 플랫폼 기업과 사용자의 균형을 맞춰줄 수 있는 ‘주의소유권’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주의소유권을 어떻게 실현할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또한 여러가지 방법들을 고안했지만, 독자들의 상상을 위해 여백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스스로 그 내용을 생각해보는 것이야 말로 나만의 나침반을 위한 ‘성찰’의 힘을 훈련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 [1] 김병규, 『호모 아딕투스: 알고리즘을 설계한 신인류의 탄생』, 다산북스, 2022.
  • [2] N. D. Schüll, Addiction by Design: Machine Gambling in Las Veg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 [3] Merriam-Webster. (n.d.). Reinforcement. In Merriam-Webster.com dictionary. Retrieved October 5, 2022, from https://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reinforcement
  • [4] 비둘기로 실험하는 경우도 많다.
  • [5] Cherry, K. (2022, May 6). How Schedules of Reinforcement Work. Verywellmind. https://www.verywellmind.com/what-is-a-schedule-of-reinforcement-2794864
  • [6] 사실 정확한 정의에서 조금 벗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한 정의가 궁금하다면 고정간격/고정비율/변동간격/변동비율의 개념을 비교해서 공부해보기를 권한다.
  • [7] Ferster, C. B., & Skinner, B. F. (1957). Schedules of reinforcement.
  • [8] Sarah (2020, August), Changes to emails you receive for new video uploads from your subscriptions. YouTube Help. https://support.google.com/youtube/thread/63269933?hl=en
  • [9] Rhodes, L. (Producer), & Orlowski, J. (Director). (2020). The Social Dilemma. Retrieved from https://www.netflix.com/title/81254224
  • [10] Covington, P., Adams, J., & Sargin, E. (2016, September). Deep neural networks for youtube recommendations. In Proceedings of the 10th ACM conference on recommender systems (pp. 191-198).
  • [11] 넷플릭스의 추천 콘텐츠 시스템 작동 방법. (n.d.). Netflix 고객센터. Retrieved October 5, 2022, from https://help.netflix.com/ko/node/100639
  • [12] Unveiling Galaxy S22 | S22+ with Bridgerton & Netflix | Samsung. (2022, February 9). [Video]. YouTube. Retrieved October 6, 2022,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o9MubcEIqxg
  • [13] [Samsung]. (2022, June 22). Galaxy S22 Ultra: Make STRANGER Nights Epic with Stranger Things 4 and Netflix | Samsung [Video]. YouTube. Retrieved October 6, 2022,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Vy5LxyMjjRU
  • [14] Eklund, O. (2022, September 12). Ads are coming to Netflix soon – here’s what we can expect and what that means for the streaming industry. The Conversation. Retrieved October 6, 2022, from https://theconversation.com/ads-are-coming-to-netflix-soon-heres-what-we-can-expect-and-what-that-means-for-the-streaming-industry-190236
  • [15] Rhodes, L. (Producer), & Orlowski, J. (Director). (2020). The Social Dilemma. Retrieved from https://www.netflix.com/title/81254224*
  • [16] 한병철, 이재영 역, 『아름다움의 구원』, 문학과 지성사, 2016, 77쪽.
  • [17] K. Kelly, The Next 30 Digital Years.
  • [18] 사실 인간 생활을 위한 공간의 최소 조건을 찾는 일은 상당히 까다롭고, 사실상 이는 인간이 지니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찾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된 조건들과 다른 조건들도 충분히 제시되고 대체될 수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시도들이 공간에 대한 논의를 더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 [19] 표본공간(Sample space)은 확률실험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결과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물론 이 개념에서 사용되는 ‘공간’이란 용어는 인간생활의 관점이 들어가지 않은 순전히 수학적인 의미라는 점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