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디지털 사회를 그려보자는 포부를 갖고 시작된 토론회 조별 토의는 영생, 메타버스, 인구 급감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물감들로 칠해진 캔버스를 만들었다. 침 튀기며 계속해서 덧칠해나간 그 그림은 밝고 어두운 상상들의 집합체가 되었고 이는 곧 검은색을 띄었다. 미래 사회에 대한 원대한 상상을 담고 있어야 할 그림은 고요했다.
허망함도 잠시, 갈라지는 목을 축이며 깊고 검은 상상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덧칠과 각자의 스케치를 보존하기 위해 바른 글레이징으로 인해 반질반질해진 검은 바탕은 회의실 천장의 전등을 비췄고, 수준 높은 강연을 이해하고 신선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민하다 헝클어진 머리들이 보였다. 이렇듯 미래 사회를 그리기 위한 노력은 결국 현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만들었다.
디지털 사회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 사회의 발전 속도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전망에 모두 동의하였다. 처음 토의를 시작하였을 때는 사회가 ‘급변'한다는 것에 집중하여 앞으로 어떠한 양상들이 생겨날지 상상해보았는데, 결국 현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을 보며 ‘급변'하는 사회 속 ‘불변'하는 가치들로 초점을 옮겼다.
기술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고로 기술 발전의 방향성 또한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얻어내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냥 각자 최근에 행복했던 경험과 그렇지 못했던 경험을 두 가지씩 공유하기 시작했다. 걸작을 그리겠다는 집념을 내려놓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막 보다 넓은 사회로 나온 학부 2학년 그리고 타지에서 석사 1학년을 밟고 있는 학생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많은 행복과 동시에 아픔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고민거리를 공유하던 끝에 ‘진정성 있는 관계'라는 키워드 앞에 모였다.
20대 초반인 우리에게 디지털은 생활화되었다. 특히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있어서 디지털은 불가분의 관계에 위치해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진정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핸드폰 속에 저장되어 있고, 나는 언제든지 그들에게 연락할 수 있다. 그러나 600명을 웃도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에 비해 나의 최근 통화목록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온다. 우리 모두가 이에 대해 공감했다.
디지털 기술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관계의 범위를 거의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마치 무리하게 늘어난 풍선껌처럼 표면적인 관계들이 모여 결국 공허함을 만들고 있었다.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는 인스타그램 팔로우처럼 디지털 사회 속의 관계들은 가소성이 매우 높다. 검은 바탕에 등장한 ‘관계의 가소성’이라는 현대 사회의 양상 그 이면에는 ‘진정성 있는 관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뭉뚱그려서 ‘디지털 사회 속의 관계'라는 카테고리를 만든 후 사회 전반으로 눈을 돌려 생각해보니 몇 년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온라인상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히키코모리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기사는 히키코모리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지적했고 그들이 현실로부터 단절된 회피성 삶을 살아간다고 비판했다. 이윽고 그들이야 말로 도래하는 디지털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한 얼리어답터이 않을까?라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제한으로 과거에는 형성되지 못했던 관계들이 인터넷을 통해 생겨나고 있다. 히키코모리들은 이 인터넷의 강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그 속에서 적극적으로 본인에게 우호적이고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관계들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들이 평범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선 결국 유의미한 관계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존재들과 형성될 수 있다는 전제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라인에 존재하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매일 마주치는 학교 친구보다 나와 친밀할 수 있는 것이고, 비록 말을 하진 못하지만 눈빛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푸들이 데면데면한 자식보다 따뜻한 위로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조에서는 예측되는 미래사회의 양상 중 하나로서 ‘비인간관계’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비인간관계’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함의를 내포한다. 먼저 종래의 인간관계가 아니라는 부정의 의미에서 ‘非’인간관계이며,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非人間’ 관계이다. 해당 가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본고에서는 ‘비인간’을 인간과 상호적인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과 기능적으로 유사한 기계적 존재라고 규정한다.
관계의 진정성을 이루는 요소
사람이 아닌 것과 교감을 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이라고 사회적 낙인을 찍는 행위의 기저에는 바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이 진정성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깬다면, 개인이 ‘체감하는 진정성'을 기준으로 우리는 진정성 있는 관계의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관계에서 진정성을 느끼도록 하는 요소 중 1) 상대방의 반응에서 오는 정서적 만족감, 2)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 3)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선정하였다.
1) 우리가 특정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관계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방은 이에 부담을 느끼며 회피를 할 수도 있고, 경청하며 같이 고민해줄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비교해보았을 때, 경청하고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과의 관계가 분명히 더 만족감을 주기에 이 관계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진정성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반응은 개인이 체감하는 관계의 진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여 나오는 로봇의 행동은 그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봇의 행동과 그에 따른 인간과의 상호 작용이 진정성 있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 또한 학습한 사회적 규범에 맞추어 행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봇이 사회적 규범에 알맞고 배려 있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학습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모방할 수 있다면 진정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2)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관계의 지속 그 자체보다는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현재 이어지고 있는 만남의 빈도와는 상관없이, 당장은 바빠서 오랜 기간 만나지 못하고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시간만 맞는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마음이기에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된다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는 믿음, 이것이 관계의 진정성에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보다는 사실 로봇과 인간 사이 관계에서 이뤄지기 쉽다. 왜냐하면 로봇은 사람이 어떤 잘못을 해도 관계를 단절하는 선택을 하지 못하게끔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요소가 관계의 진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3) 바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믿음을 중요한 요소로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 바탕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관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관계에 감사함을 느끼고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관계에 진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기계-인간의 존중과 배려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기계가 인간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아직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관계는 상호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상대로 대하지 않는다면 비인간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여기서 잠시 “배려”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배려는 남의 욕구를 나의 욕구보다 우선시해 행동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의미 있는 관계 속에 있다면 관계의 상대방을 고려해 행동하고, 때로는 그의 욕구를 내 것보다 우선시해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배려다.
물론 이러한 배려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욕구를 살필 수 있어야 하고, 상대방을 나 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를 “존중”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존중은 인간에게만 적용되어 왔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존중의 범위는 점점 넓혀져 왔다. 로봇이 상용화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로봇의 존중받을 권리도 인정될 것이다.
현재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기준을 “비인간관계”에도 적용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비인간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배려가 필요하다. 분명 인간이 로봇을 배려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친구인 것처럼,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을 나보다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데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그리고 상대방을 나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다면 배려는 당연히 따라나온다.
물론 인간이 로봇에게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쩌면 로봇이 인간과 같은 반응을 보이도록 설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비인간관계가 일반화되는 사회에서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잃지 않으려면 로봇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필수적이다.
비인간관계, 즉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 전망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비인간관계가 일반화된 사회를 가정했을 때 그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서 다소 암울해 보이는 미래가 도래하리라 예측합니다. 저는 왜 비인간관계가 일반화되었을 때 인간관계가 대체되어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화의 흐름에 따르면 생명체는 항상 편안함과 안정성을 추구합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는 과정은 훨씬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다지 개선되지 않은 채 사람들을 꾸준히 괴롭히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 입니다. 소외, 답답함, 후회, 배신감 등 인간관계에서 참 여러 가지 상처를 받습니다. 어떨 때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도피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 때문입니다.
인간 두뇌가 다른 영장류에 비해 커진 이유는 오로지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함이라는 이론이 있을 정도로 인간은 관계에 민감하고, 또 추구합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 나약한 인간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희열은 인간관계가 주는 불편함 만큼이나 매우 강력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 속에서 이 사회적 본성은 때로는 피곤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던바의 숫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두뇌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관계의 수는 약 150명에 그칩니다. 하지만 초연결사회에서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수는 150명을 훌쩍 넘습니다. 이들의 감정을 고려하고, 그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고, 심지어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까지 계산하다 보면 아무리 사회적 두뇌라고 해도 할 일을 다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파트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관계의 양적 폭발은 질적 감소로 이어지며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관계에 피로하고 상처받지만 외로워 하는 것이 현대인의 주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최근 들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 또는 채우지 못한 만족을 강아지나 고양이를 통해 해소하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 주변인들 중에서 “어떨 때는 사람들과 있는 것보다 내 말을 다 들어주는 강아지와 있는 것이 더 편하다”, “고양이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위로가 많이 된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동물과의 관계로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동물과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고, 함께 영화를 보며 토론할 수도 없고, 농담을 던졌을 때 웃는 반응을 보며 즐거워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즐거운 일을 함께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공감해주고, 함께 울고 웃는 존재. 당신이 던지는 말에 전부 호응하고, 당신의 취향과 너무나 똑같아서 당신과 그 사이에 갈등 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존재. 당신이 배려하지 않아도 전부 받아주지만, 당신의 모든 것을 맞춰주는 그러한 존재. 마치 당신을 위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존재. 그러한 존재가 있다면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시간을 쏟기보다 이 존재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기계가 바로 이 “존재”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미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의 취향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나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면 거의 인간의 대화와 유사하게 말하는 인공지능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봇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며 인간의 행동을 모사하는 로봇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기술의 놀라운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10년 안에도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존재, 즉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이 비슷하게 생겼고, 상대방의 취향을 모두 고려해 가장 적합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로봇이 등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허황된 꿈 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로봇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안드로이드처럼, 겉으로 살펴보거나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전혀 인간과 구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로봇들이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널리 퍼지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더 오래 걸리겠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모든 사람들이 집에 로봇 “친구” 하나쯤은 있는 사회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런 “친구로봇”들이 상용화되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이전까지는 없었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셈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두 가지 옵션 중에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쪽에는 인간-인간 관계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걱정하며 상당한 에너지를 들여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등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반면 노력에 비해 모든 인간관계가 즐겁지는 않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존재하고, 어색할 때도 있고, 상대방과 나의 취향이 너무 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옵션, 로봇-인간 관계, 즉 본문에서 “비인간관계”라 칭한 종류의 관계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그를 배려하지 않아도 로봇은 항상 나를 기쁘게 해줄 터니까요. 나와 너무나 잘 맞는 로봇,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의 취향과 나의 관심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로봇이 다 받아줍니다. 갈등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로봇은 오직 당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 사회에 도입되면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익숙해진다면 어느새 로봇-인간 관계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점점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굳이 피곤하게 관계를 맺지 않고 자신의 전용 친구 로봇과만 관계를 맺으려 할 것입니다. 만약에 다수의 그룹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로봇 여러 대를 장만하면 됩니다. 당연히 로봇들 사이에서 소외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로봇들 사이에서 당신은 소위 “인싸”, 관계의 주인공입니다. 만약에 주로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설정을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로봇이 자신이 요즘 느끼는 감정들이나 새로 시작한 취미, 자신이 아는 다른 로봇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을 것입니다. 로봇과의 연애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할 스타일에 따라 로봇이 적절히 밀당을 하거나 화끈한 고백을 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갈등, 소외감, 배신감 등 부정적인 감정 뿐입니다. 전혀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하는 로봇들이 있는데, 굳이 애써서 사람들 과의 관계를 찾을 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비인간관계가 일반화되는 순간 이러한 변화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불편할 수 있는 모든 요소는 모두 제거해 놓은 비인간관계는 당연히 인간관계에 비해 편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로봇과 친구를 하고 있다는 심리적인 불편함은 곧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되먹임 순환을 가집니다. 인간들 과의 관계를 기피하고 비인간관계로만 자신을 둘러싼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힘은 퇴화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의 이기심을 표출하는 능력은 꽃을 피울 것입니다. 사회적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는 보통 이러한 상태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장 주지 않으면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하며 “떼를 씁니다". 그렇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며 사회화되고, 자신의 욕구를 절제할 수 있는 방법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 비인간관계가 일반화되며 펼쳐질 사회는 성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기 이기심을 절제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회입니다. 로봇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데, 절제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배려하지 않아도 나와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데, 왜 로봇을 배려하겠습니까?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인간 관계를 맺기란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자석의 같은 극이 밀어내는 것처럼, 모두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리라 기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인간 관계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상처와 다툼이 깊어질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관계를 맺고 싶어도 맺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예측을 한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닙니다.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벌거벗은 태양>에서는 인구 밀도가 극히 낮은 행성, “솔라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성 하나에 단지 2만명만 거주하는데, 한 사람당 수천개의 로봇을 거느리며 살아갑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수km2에 다다르는 영지를 다스리고, 절대 다른 사람의 영지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솔라리아인들은 다른 인간과 접촉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심지어 역겹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할 때는 오직 화상으로만 대화합니다. 로봇들에 둘러싸인 삶 만을 편하다고 느낍니다.
“솔라리아인들은 인류가 100만년 이상 이어왔던 것을 버렸다. 원자력, 도시, 농업, 도구, 불,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한 것,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을 버렸다… 사람들 간의 협동 말이다.”
솔라리아인들의 대인기피증은 얼마나 심했는지, 소설 속에서 유난히 사람을 싫어했던 솔라리아인 한 명은 어떠한 사람이 자신의 집을 직접 방문한다고 하자 공포스러운 나머지 음독 자살합니다. 물론 아시모프가 과장을 섞어 표현한 것이지만, 비인간관계가 일반화된다는 가정 하에 아예 억지스러운 설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솔라리아 사회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를 원하는 한 여자 (당연히 소설의 주인공입니다)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과도 수백 km 떨어져 사는 그녀에게 솔라리아에서 인간관계를 찾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사회가 인간관계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사라진 사회, 과연 어떨까요? 이미 제가 묘사하는 것에서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인간관계가 사라진 사회를 관계 자체가 사라진 세상으로 바라봅니다. 제가 예측하는 미래에서,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는 사실 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과연 친구로봇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로봇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따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로봇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애초에 인간관계 대신 친구로봇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로봇 관계가 일반화된다면 이는 배려하는 것에 지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당연히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에 지쳐 로봇에게 온 인간이 로봇에게도 배려를 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진정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자발적인 로봇들에게 둘러싸인 인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법을 잊어버린 인간, 사랑할 줄을 모르게 된 인간이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비인간관계의 개발은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길의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아시모프의 말을 인용하며 맺겠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사라지면 삶의 가장 큰 재미가 사라진다. 지적 기능 대부분의 가치가 사라진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대부분이 사라진다.”
(Disconnectivity: 단절, 소외, 연락 없음, 단선.)
1. 쉽게 끊어지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흔히 디지털 사회를 정의하는 요소 중 하나로 connectivity의 증가, 즉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잊고 지내던 초등학교 친구가 페이스북 추천 친구로 떠오르고, 평소 동경하던 외국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연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에는 닿지 못했을 인연들을 매일 생성하며 관계의 망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정된 시간과 주의력이 지나치게 많은 관계들로 분산되어 피로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쉽게 보입니다.
최근 떠오른 소셜미디어 (SNS)의 기능을 보면 내 일상의 매순간을 생중계할 수 있는 기능들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기능이 있습니다. 스토리 기능을 통해 올린 사진이나 영상은 24시간 동안 타인에게 노출됩니다. 이는 기존의 게시글과는 달리, 경험이 진행되는 순간을 공유한다는 특징을 잘 담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공유를 통해 나의 일상에 사소한 순간들에도 불특정 다수의 타인이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은 극심한 정신적 피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그 순간을 공유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에 매몰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피로한 기능들이 왜 각광받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관계의 가소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가소성이라 함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쉬워진 만큼 기존의 관계를 버리는 것의 기회비용이 줄어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과거에 타인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어색한 친척, 불편한 이웃, 껄끄러운 친구 등을 회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많은 관계들은 카카오톡의 차단 버튼 하나로 마감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소외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데에 기여합니다. 새로이 생성되는 관계가 많아지는 만큼, 수면 아래 소원해지고 끊어지는 관계의 수도 그만큼 많은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SNS 중독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았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독자들은 SNS를 통해 얻는 행복감보다 활동이 뜸해졌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줄어드는 것을 극도록 두려워하기 때문에 SNS를 끊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현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SNS의 목적이 개인적인 충만감을 위한 것이 아닌 주변 관계로부터 소외받지 않으려는, 단절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Dr.Andrew Przybylski는 2013년 ‘Fear of missing out (FOMO)’으로 정의하며 병리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본 글은 이와 유사한 개념을 보다 확장하여 ‘발전하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disconnectivity’에 초점을 맞추고, 현대인들의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disconnectivity에 대한 두려움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2. 연결되어 있지만 공허한 관계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과시하고 관계의 돈독함을 수치화하여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SNS 기능들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스냅챗의 ‘스트리크' 기능이 있습니다. 이 기능은 특정 상대와 주고받은 메시지, 사진, 음성 녹음 등 여러 교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그 관계의 친밀도를 수치화하여 나타냅니다. 스냅챗 이용자들끼리 특정 친구와의 “100 스트리크 달성"등을 축하하는 메시지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이처럼 스트리크는 관계의 깊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보다 폭넓은 연령층이 사용하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로 교류의 빈도수를 측정하는 다양한 지표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공유 횟수, 좋아요, 리태그 등의 기능들을 통해 특정 인물과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들이 과연 그 관계의 진정성을 배양하는 데에 효과적일까요? SNS를 통한 위로나 공감이 실제 대인관계에서 경험하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만족감에 비해 그 효과가 저조하다는 연구 결과들은 기술 발전이 진정성 있는 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뒷받침합니다.
현대 기술이 초월적인 연결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사회를 선망하는 향수적인 테마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드라마, 영화, 플랫폼 등이 크게 흥행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비롯해서 싸이월드의 부활은 과거 사회 속에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1990~80년대가 배경인 드라마를 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4-50대 시청자들과 달리 MZ 세대는 전해들었던 이야기들만을 바탕으로 당대의 사회를 상상하고 그에 공감합니다. 이처럼 반추할 개인적인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시리즈가 MZ 세대를 비롯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인물 간의 ‘진정성’을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작은 골목 동네에 붙어살며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그들은 긴밀해서 다소 불편하고 일상적인 관계를 살아가지만 시청자들은 그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정'을 포착합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인터넷과 디지털 사회의 많은 기술들은 다소 놀랍게도 관계의 공허함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술이 상용화 되지 않았던 과거의 불가피한 관계들의 소중함과 자연스러운 우연의 아름다움이 재조명 받고 있습니다.
3. Disconnectivity의 극복기술의 미래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와 이상에 기반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끊임없이 꿈꾸고 실현시키기 위한 도전이 바람직한 기술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디지털 사회 속에서 disconnect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는 현상을 바라보며 이를 기술로서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그것이 옳은 접근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기술을 통해 관계 형성이 용이해진 것은 분명 긍정적인 발전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진정성'이라는 본연적인 가치를 찾는 것은 기술 발전과는 별개로 끊임없이 제기되는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SNS 상의 관계를 통해 단순히 더 잦은 연락, 생생한 영상, 좋은 음질의 통화가 관계의 진정성에 기여하는 바가 한정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메타버스를 통해 마치 한 공간에 있는 듯한 기술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과연 진정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상상의 폭을 넓혀보면 기술의 발전을 통해 관계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가 되는 것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혹은 동물과의 교감 등을 통해 교류의 대상이 보다 다양해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가치 있는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 또한 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성'이라는 가치는 스냅챗의 스트리크 수치로, 혹은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개수를 통해 정량화할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즉, 관계의 진정성은 그 관계 속에 있는 대상자들만이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대상과의 관계가 진정성 있는 관계로 다가오는가 또한 개인마다 모두 상이할 것입니다.
이처럼 관계의 다양성을 고려했을 때 기술을 통해 관계의 진정성을 실현하는 접근법 중 하나는 바로 비인간관계를 통해 기존의 관계에서는 찾지 못했던 만족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비인간관계를 통해 만족감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일례로, 자녀를 통해 얻지 못하는 행복을 반려견을 통해 경험하는 반려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이해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그 인공지능과의 관계가 다른 인간과의 관계보다 더 높은 만족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본 장에서는 비인간관계가 현실화될 때 예상할 수 있는 사회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비인간관계가 인간사회를 구성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인간과의 관계 재정립 및 인간과의 동등한 지위 부여가 중요한 논제인 사회를 논의의 시작점으로 삼을 것이다.
서두에서 제시된 ‘비인간관계’의 정의를 생각할 때 비인간의 두 가지 특징인 ‘불멸성’과 ‘생산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비인간의 불멸성’은 태생적으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과 달리, 인공물인 비인간은 시간적 유한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의 자각에는 ‘시간’이 결부되지 않을 수 없기에, 인간은 일정한 시간 속에서 일회적 삶을 산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존재’를 느끼는 현존재(Dasein)로서 존재한다. 나아가 인간은 유한성 속에서 존재를 자각하기에 불멸을 희구하며, 유한성으로 인한 한계를 제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비인간은 생명체처럼 본능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는 없다. 설령 비인간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더라도 새로운 하드웨어에 백업된 데이터를 불러온다면 이는 죽음이 아니라 단순한 시간의 공백이 되고 만다. 이러한 특성은 비인간이 인간의 유한성을 당연히 전제하고 만들어진 인간 사회 및 제도와 시간적 흐름의 불일치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인간이 가진 불멸성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종교와 사법체계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인 ‘비인간의 생산가능성’은 인간과 달리 기계인 비인간은 생산을 위한 제반 시설과 부품이 충분하다면 제작자의 의도에 맞춰 원하는 대로 무한에 가깝게 양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인간은 누군가가 그 개체 수를 임의로 조정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 역시 임신과 비교할 때 매우 짧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비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에 편입된다면, ‘인간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누릴 가능성이 상당한 존재’를 ‘기존과 같이 물건을 생산하는 것처럼 취급해도 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1] 나아가 비인간이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권리 또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를 ‘생산’하는 권리를 누구에게, 어떻게 귀속시킬 것인지도 논의해야 한다. 비인간이 가진 생산가능성은 정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정치 영역정치 영역에서 비인간에 대해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는 ‘과연 비인간에게 시민의 지위를 인정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라고 생각한다.[2] 현대 민주사회에서 ‘시민’이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며 의무를 부담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정치적 단위로서의 시민이 가지는 주요한 권리는 참정권과 공무담임권이라고 할 수 있다. 참정권과 공무담임권을 통해 시민은 공동체의 정치적 결정과정에 참가하는 주권의 행사자이자, 국가조직체의 일원으로서 공무를 담당하는 주권의 수탁자가 될 수 있다.
비인간을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인간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포섭하는 것을 넘어, ‘인간’인 시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주권을 비인간과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인간에게 주권을 공유할 수 있는 지위를 인정할 때 발생가능한 논제는 ‘기계를 생산하여 부릴 수 있는 특정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례로 미국 독립전쟁 이후 각 주가 가지는 하원의석수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노예를 소유하는 남부와 소유하지 않는 북부 간에 있었던 ‘노예 인구를 유권자 수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라는 논쟁을 떠올릴 수 있다.[3] 비인간이 유권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다면 비인간을 많이 보유한 지역 및 이익집단의 대표성이 크게 늘어날 것이고, 이에 따라 비인간의 특성인 ‘생산가능성’이 정치적 지형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비인간의 ‘생산’에 관한 규제가 도입될 공산이 크다.
비인간을 위한 정당의 등장도 예상해 볼 수 있는 사안이다. 정당은 정치적 영향력의 표출을 목적으로 조직된 자발적 결사체인 만큼, 만일 비인간이 인간처럼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다면 비인간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비인간-정당이 등장할 수도 있다. 비인간을 위한 정당의 등장은 현실의 동물당에 대입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동물당이 동물의 권익을 보호하고 동물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재고를 위해 등장했던 사례를 고려한다면, 인간과 비인간의 평등하고 호혜적인 교류와 기계친화적 가치의 재고를 위한 비인간-정당이 등장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앞의 두 논의가 인간 사회 내에서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비인간만의 국가공동체 등장은 비인간이 공동체적 차원에서 인간공동체와 교류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비인간이 비인간을 위한 사회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현재 기존 국가를 대체하려는 시도인 ‘비트네이션(Bitnation)’과 ‘시스테딩 인스티튜트(The Seasteading Institute)’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례 모두 기존의 국가가 가진 한계—늘어난 인구를 효율적으로 대표하기 어려운 중앙집권적, 수직적 형태를 가진 현대정부의 한계, 출생만으로 부여되어 사람들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국적의 한계 등—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실험으로, 개인이 느끼는 필요를 바탕으로 발전된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양상의 국가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처럼 국가가 고정적이고 시민은 태생적으로 국가에 소속된다는 국가 중심적 사유가 도전 받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미래에 보다 발전된 기술을 이용하여 비인간만의 국가를 창조하겠다는 발상 역시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비인간 정치참여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면서 미래사회에 또다른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논제는 사이보그의 정치 참여이다.[4] 신체의 일부 또는 상당부분이 기계로 대체된 사이보그 역시 종래의 인간관에서 벗어난 존재이며, 정신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육체적으로는 기계적 요소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간과 비인간의 중간지대에 놓인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다. 비록 비인간보다는 인간과 유사하지만, 사이보그 역시 ‘순수한 인간’과는 다른 환경, 다른 이해관계에 놓일 공산이 크기 때문에 사이보그가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은 비인간의 정치참여와 일정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띨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만일 한 사회에 사이보그의 정치참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면, 비인간의 정치참여 과정 역시 사이보그의 정치참여를 경험하지 않은 경우보다 수월할 것으로 추측된다.
종교 영역비인간의 등장은 ‘죽음’의 극복과 ‘지향점’의 상실이라는 두 측면에서 종교에 거대한 변혁의 물결을 몰고 올 수 있다. 종교가 탄생한 이래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인간의 필멸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사후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시작된 종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교리에 입각한 설명체계를 제시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면서, 현세를 종교가 추구하는 윤리적 체계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내세에서의 심판 또는 보상 등—을 제시해왔다. 상기한 종교의 기능은 종교의 권위가 약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한다. 종교는 유한한 인간의 삶 속에서 정신적인 지지대의 역할을 하는 종교적 지향점을 제시함으로써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구원을 추구하도록 도우며, 이를 통해 인간이 후회 없는 삶을 영위하고 죽음을 편안히 수용할 수 있도록 조력한다.
그러나 비인간의 등장은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명제에 대한 수정을 유발함으로써 ‘유한성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종교의 기능에 변화를 강요할 수 있다. 이는 비인간이 인간과 비인간관계를 구축하면서, 이로부터 비롯되는 비인간에 대한 친숙함이 비인간이 가진 기계육신에 대한 적응으로 이어져 육신의 기계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다문화사회로의 진입 및 이주민과의 교류증가가 외국인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춰 그들의 ‘낯섦’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 듯이, 비인간이 인간 사회에 편입될수록 비인간이 가지는 인간과는 다른 특성들이 관용될 가능성이 증가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인간이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인 ‘기계로 이뤄진 신체’에 대한 사회적인 수용도 이뤄질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외래요소의 유입과 정착이 사회문화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왔던 것처럼, 비인간의 기계 육신에 대한 적응은 인간들의 육신에 대한 인식을 親기계적—단순히 의수나 의족 등 인체의 손실된 부분을 인공적 보장구로 보완하는 것을 넘어 육체를 완전히 기계로 대체하는 수준까지—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5] 비인간관계의 확산과 수용은 은하철도 999에서 묘사되는 ‘기계화’와 개념적으로 비슷한 ‘육체의 비인간화’를 촉진하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로 작동할 수 있다.
상기한 변화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종교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기능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이는 이미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종교에게 있어 자신의 존립 근거를 위태롭게 만드는 또다른 변화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육체의 비인간화’로 인해 변화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기계육신이 확산되는 세상에서 대두되는 가치문제로 육신의 변화로 획득한 불멸성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가(‘어떻게 불멸을 소비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예상할 수 있다. 필멸성이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한정된 시간을 소중히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안겨왔다면, 육체의 비인간화로 얻게 될 불멸성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무한히 지나가게 될 시간의 흐름을 버틸 수 있는가’ 내지 ‘불멸이라는 가능성 속에서 어떻게 삶을 개척할 것인가’라는 전대미문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만들 것이다. 때문에 새롭게 등장할 종교는 필멸과 유한, 초조함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불멸이 주는 무한한 시간으로 인한 권태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해답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신흥종교가 사회의 열망을 반영하여 등장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래에는 기계의 불멸성에 대한 사회의 열망이 종교의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법률 영역사법체계 역시 비인간의 등장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6] 특히 형사체계가 그러한데, 이는 형벌이 종교와 함께 인간이 유한성에 대해 가지는 공포—유한하기에 생명과 자유, 재산을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에 기반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7] 유한성에 대한 공포는 무법 상태에 대한 공포와 처벌에 대한 공포로 나뉠 수 있다. 무법상태에 대한 공포는,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설명했듯이,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에서는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비롯한 이익 전반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무질서로부터 오는 혼란이 자신의 이익을 침해할까 두려워하기에, 생명과 소유물에 대해 보호받는 것을 대가로 사회가 합의한 규칙에 순응한다. 처벌에 대한 공포는 응보와 예방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사회의 규칙을 어기고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하여 가해의 정도와 상응하는 처벌을 내림으로써 부정의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면서(응보), 사회구성원에게 범법행위가 처벌을 수반한다는 경고를 전달함으로써 잠재적 범죄를 예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상기한 두 가지 유형의 공포 모두 자신이 가진 것을 박탈당한다는 공포를 바탕으로 사회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비인간이 등장할 경우, 상기한 ‘공포에 기반한 순응’이라는 명제가 변동될 수밖에 없다. 앞서 논의했듯이, 형벌은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사람들을 규율하는 체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인간으로부터 무엇을 박탈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비인간이 인간과는 달리 유한성에 구애받지 않고 (조건이 충족된다면) 무한한 삶과 결함 없는 신체를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형벌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자유형과 생명형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8] 따라서 비인간에게 형벌이 의미 있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비인간에게 ‘박탈’의 감각을 느끼게 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 예를 들어 생명형과 비슷하게 기록말살형을 본딴 데이터 말소형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기계를 인간처럼 좀 더 고도한 단계로 진화시키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입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기계의 진화의 최종 단계는 사회적 규범에 알맞게 행동하는 로봇이다. 여기서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은 매우 모호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은 고맥락 사회에서는 이를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기준이 실제로 모호하여 의견이 다양하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몇가지 사회적 규범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로봇이 잘 지켜낼 수 있다면 정말 고도로 진화한 기계일 것이고 사람이 유대감을 느낄 가능성이 더 높다.
이와 동시에, 아마 크게 의도하진 않았지만, 인간 또한 기계로 진화하고 있다. 꼭 기계 의수와 같은 것을 착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를 들고 다닌다. 외부 메모리 역할을 해주는 스마트폰 없이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한 사람의 몫을 온전히 해낼 수 있는가?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이미 몸의 일부를 기계화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계인간으로의 진화다. 인간은 신체 능력을 기술로 계속 보강하며 진화하고 기계는 인간의 외양과 행동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여 기계인간이라는 중간 지점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다.
기계인간 사회, 대한민국인간의 기계화 같은 물리적인 변화 말고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바로 사회적 기준의 변화다. 기계를 평가할 때 ‘얼마나 사람 같은가’ 또는 ‘사람보다 얼마나 뛰어난가’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이런 기준이 우리에게 돌아와, 사람을 ‘얼마나 기계 같은지’ 또는 ‘기계보다 얼마나 뛰어난지’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기계가 인간과 겉모습이 같아지더라도 절대 해선 안 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실수다. 의도적으로 오류 생성을 코드에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즉 실수가 기계의 업무가 아닌 이상 주어진 업무에 있어서 실수를 하는 기계는 쓸모없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점점 없어지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없어질 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실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특히 한국사회는 ‘실수’에 굉장히 예민하다. 업무를 실수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이제는 이를 넘어 삶의 전반에 걸쳐서 마치 기계처럼 단 하나의 도덕적 실수마저 해선 안 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나는 이런 사회적 기준의 변화에 의해 한국 사회의 피로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관계의 단절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관계를 이어 나갈 때 서로 생각하고 배려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언제든지 연락이 닿을 수 있고, 더욱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개인 혼자만의 시간이 줄어들어 관계에 피로감을 쉽게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으레 그들이 가지고 있을 높은 도덕적 잣대,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피로감의 이유 중 하나다.
사회적 피로 해소지금까지 보였던 양상과는 다르게 앞으로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육체적 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 피로감마저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아직 적절한 방법을 찾고 도입하지 못했을 뿐이다.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은 전부 기계가 해주고 인간은 본인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만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상상해보자. 모든 일이 항상 의도했던 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삶의 모든 곳에서 만족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먹고 살기 위해서 했던 노동으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를 확연히 줄일 수 있다. 이렇게 아낀 정신적 여유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쓸 수 있다. 당장 해결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도 잠깐의 낮잠 또는 산책 이후에 마법같이 해결이 되는 경험을 모두 한 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 차원에서도 사회 차원에서도 자정 능력이 있다. 단지 이를 위한 여유가 필요할 뿐이다. 기술이 많은 일을 대체해주고 있는데 왜 여전히 사람들의 삶은 이토록 피로한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피로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품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사회적 부담을 줄이고 여유를 더 가질 수 있게 정서적 만족감을 기계와의 관계에서 채우는 것을 포용하는 새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관계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기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로 이동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만족을 위해서 인간 대 인간 관계가 비는 곳에 인간 대 로봇의 관계를 채워넣는 것을 포용하자는 뜻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사회가 가진 인식이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비슷하게 행동하는 로봇이 나타나고 이들과 상호작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분명히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생겨날 것이다. 이들이 느끼는 유대감을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사회가 되어야 사회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서 내 삶을 이루는 관계를 구성해 나가는 그런 자유를 가질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따라서 현재 가지고 있는 많은 사회적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이 될 것이라고 예측해 본다.
포용하는 사회에서의 비인간관계의 긍정적 효과로봇은 배려하지 않아도 우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익숙해져 사람들이 점점 더 배려 없는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이는 1)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인간관계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 2) 상대를 배려하지 않아도 비인간관계는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믿음에 대해 아래에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물론 매번 배려하지 못하는 인간관계는 유지되기 힘들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쯤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해도 괜찮고 서로를 한번 더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회라면 어떨까. 실수를 한다고 해도 매몰차게 굴지 않거나, 실수를 한번 했다고 해서 완전히 소외될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이런 실수가 용서되고 실수하는 사람이 포용된다면, 사람들의 삶을 이루는 관계가 꼭 비인간관계에만 치우치지 않을 것이다.
2) 로봇은 꼭 인간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반응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고도화로 발달된 로봇이라면, 인간의 행동이 사회적 규범에 맞추어 판단할 때 인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면 적절한 거부, 회피, 화 등의 반응을 하도록 로봇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잘 설정된 합리적인 로봇과 상호작용하며 관계에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것이다. 로봇의 설정만 잘 한다면 인간을 잘 교육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비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의 평판을 망치는 실수를 하지 않고도 사회적 규범을 배울 수 있다. 사회적 규범을 넘어 로봇에게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실수를 해도 용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정신적 에너지는 한정적이기에, 하루에 가능한 용서와 이해의 횟수는 당연히 로봇이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비인간관계를 포용함으로써 더욱 많은 용서와 이해를 경험하고 따라서 더욱 많은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로봇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용서와 이해 뿐만이 아니다. 이미 지금의 기계들이 그러듯 삶의 많은 부분에서 로봇이 우리의 노동을 대체해주어 편의가 늘 것이며, 놀이 로봇과 같은 로봇이 더 다양해진다면 훨씬 더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까지 줄 수 있다. 이런 정서적 만족을 비인간관계에서 채우는 것을 포용하면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관계의 진정성을 이루는 세 가지 중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싶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 없이는 그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큰 만족감을 얻더라도 진정성 있는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다. 타인을 정서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학대를 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것은 진정성 있는 관계라고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에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관계는 일방적으로 내가 만족했다고 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떠나서 내가 상대를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가 이런 믿음이 형성되는데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이미 내 삶에 깊숙이 들어 온 존재를 존중할 줄 아는 것은 비인간관계가 더욱 보편화될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소양이 될 것이다.비인간관계의 진정성에 집중하여 논의를 이끌었지만, 현재 존재하는 그리고 미래 사회에 존재할 모든 관계의 진정성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계속 해서 발전할 것이다. 생산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물질적 풍요는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풍요는 어디서, 어떻게 얻을 것인가? 우리 사회가 기술의 발전으로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 풍요까지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 [1] 이는 19세기 서구사회에 노예해방운동이 본격화될 당시 ‘노예를 동등한 인간으로서 취급할 수 있는가’라는 역사적 논의와 유사한 사회적 맥락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2]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해당 물음은 자연스럽게 근본적으로 ‘비인간을 인간과 동등하게 취급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존의 논의들(예: 인공지능을 인간처럼 취급해야 하는가? 등)이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이기에, 본장에서는 비인간이 인간과 유사하게 고등한 사고가 가능한 존재이므로 권리를 누릴 가능성이 있는 ‘이성적 존재’에 부합한다는 정도로 가정하고자 한다.
- [3] 미국의 각 주들이 하원의석을 할당 받는 방식은 인구비례에 따른 의석 분배이다. 당시 남부주들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노예를 1명의 유권자로 산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이에 대항하는 입장이었던 북부주에서는 노예가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유권자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당시 북부주가 원했던 연방정부의 대외무역 감독을 인정하는 대가로, 노예는 유권자의 3/5를 차지한다는 합의를 만들게 되었다.
- [4] 사이보그가 언급된 이유는, 인간과 기능적으로 매우 유사한 비인간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기술력이 존재한다면, 자연히 인간의 육신을 기계로 대체하는 기술 역시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논리적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다.
- [5] 상기한 변화는 ‘불로불사’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열망과 ‘순수한’ 육체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진시황이 찾으려 했다는 ‘불로초’나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가 찾았다는 ‘젊음의 샘’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죽음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이를 극복하는 것을 희망해왔다. 따라서 기계로 신체를 재구성해 불로불사를 누리는 것은 죽음을 넘어선다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온 정신적 유산—유가(儒家)의 ‘신체발부수지부모’(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네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나, ‘인간의 육신은 신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라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 등—을 보유하고 있다. 상기한 정신적 전통을 미뤄봤을 때,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져왔던 전통적 신체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인간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면서 인간과 동등한 의식적 기능을 가짐으로써 종래 인간의 특성으로 간주된 ‘이성’을 보존하며 육신의 노쇠함에서 비롯된 질병이나 죽음이 극복 가능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비인간관계의 구축 및 사회적 확산은 ‘육체의 비인간화’를 통한 불로불사의 실현가능성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비인간에 대한 친숙함을 통해 기계육신에 대한 거부감을 낮춰 전통적인 신체관을 약화시킬 수 있다.
- [6] 비인간의 행위능력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비인간은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의식적 기능을 가진다’라는 가정 하에 비인간이 인간과 동일한 행위능력을 지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 [7] 민사법체계의 경우, 형법과 같이 엄격한 형식론을 고수하기 보다는 거래계의 안정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법체계이기 때문에 비인간이 인간과 같이 종래의 시장 및 민사법질서에 녹아들 수 있다면 채권 및 물권과 관련된 변동은 적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상속법과 친족법의 경우, 비인간이 종래 인간의 생식 및 사망과는 상이한 양태를 보인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근본적인 변화 없이 비인간의 ‘생산’을 출산으로, 비인간의 ‘영구 작동중지’를 사망으로 치환한다면 충분히 기존의 법체계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8] 예를 들자면,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비인간에게 있어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박탈하는 자유형은 비인간의 행위를 제재하는데 있어 별다른 억제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