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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22

Homo Vanitas : 디지털 사회의 공백 인간

미래사회에 제시하고 싶은 키워드는 호모 바니타스(Homo Vanitas), ‘공백 인간’입니다.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로 비어 있음, 헛됨, 공백을 가리킵니다. 호모 바니타스는 공백 속에서 출현하여 활동하며 그 공백을 채우고 나서, 다시 영(0), 즉 공백과 같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N번방 사건’에서 이미 호모 바니타스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공론화하고,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추적단 불꽃을 필두로, 이 사건 해결과 범죄자 검거에 협력했던 개인과 단체들입니다.

먼저 ‘N번방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여러 가해자들이 조직적으로 공모해 미성년자가 포함된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물 영상을 찍고, 이를 거래해 온라인으로 유포했던 사건입니다.

‘N번방’에서 벌어진 범죄행위들은 불과 10여년 사이에 등장한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먼저 성착취 가해자들과 이들에 가담하여 동영상을 제공받고 유포시킨 이들은 모두 텔레그램이라는 강력한 보안 채팅 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금전 거래, 음성적인 대가 수수는 블록체인을 이용한 암호화폐 기반의 새로운 금융 경제 구조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즉, 개인과 사회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디지털 기술 위에서 이 모든 범죄 행위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최초의 ‘N번방’이 만들어진 이후 경찰도, 언론도, 혹은 우리가 의지해온 어떤 공공기관도 사건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수 년이 흘렀습니다. 디지털 기술로 빚어진 사회적 공백 속에서 왜곡된 성의식을 가진 이들의 반인륜적인 조직적 가해행위가 오랫동안 은폐되고 방치되었습니다.

공백에서의 문제와 해결

N번방 사건이 ‘디지털 사회 속 공백’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정의한 데에는, 사법당국을 포함한 국가가 해당 문제의 해결 주체로 나서지 못한 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사건 해결에도 이들 공공기관의 역할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성범죄와 같은 형사사건 해결은 전통적으로 국가에게 기대되는 역할입니다. 근대국가의 체제 속에서, 국가권력이 확대되어온 만큼 범죄와 관련해서는 많은 권한이 국가에게 부여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미래에는 이 디지털 기술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적 공간에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가 계속 생겨날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사회’ 중에서 국가권력이 닿지 않는 공백 영역에 끼칠 수 있는 공공 부문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며 그 문제해결능력 또한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추적단 불꽃의 활동가였던 대학생 2명은, 정부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이 문제를 2019년 7월 발굴하고 7개월 동안 조사한 이후인 2020년 3월 공론화하했습니다. 그들은 7개월 동안 범죄행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목격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추적단 불꽃 이외에도 블록체인 기술 엔지니어 그룹이 수사에 협조하여 블록체인 암호화폐 환전기록을 추적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1] 암호화폐 거래분석 업체인 크립토퀀트는 구속된 조주빈의 암호화폐 지갑 데이터를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덕분에 경찰은 주요 용의자 검거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바꿔말하면, 경찰과 사법당국은 스스로 암호화폐 거래에 관한 기초적인 수사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디지털 사회의 공백이 빚어낸 공간에서 국가, 정부, 혹은 그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은 기존의 공동체유지장치가 이것이 해결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문제와 마주치고, 이것을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과 자원, 네트워크 이를 스스로 구축하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 예컨대 추적단 불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속 신인류, 호모 바니타스입니다.

텔레그램 계정 기준 ‘N번방’ 범죄 관련 혐의자는 성착취영상을 소지한 이들을 포함하여 6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2] 사건발생 2년 후인 지난 5월 기준으로, 조주빈 등 주요 가해자를 제외한 ‘일반’ 가담자로 기소된 이들은 378명으로, 전체 혐의자의 약 0.5%만이 법의 심판을 받았습니다.[3] 그 이후에도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고 있고, 이번에도 디지털 공간의 젊은 활동가들이 이 사건의 해결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4]

결론적으로 사건을 통해 확인된 공백은 ‘사각지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 보입니다. 추적단 불꽃과 같은 ‘호모 바니타스’의 출현과 이들의 활동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디지털 사회에서 생겨나는 공백

디지털 사회에서의 국가의 역할에 대해 논하기 위해, 먼저 디지털 사회를 명확히 정의하고자 합니다. 디지털 사회에서 흔히 언급되는 ‘디지털’, 즉 ‘디지털 기술’ 은 정보를 데이터화하는 지식, 그리고 이 지식으로 개인과 사회가 요구하는 상상을 구현한 결과물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디지털 사회’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디지털 기술로써 새로이 구현된 가상사회, 예컨대 ‘마인크래프트’나 ‘제페토’ 같은 메타버스 공간 또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디지털 사회관계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이러한 가상공간이나 디지털기술이 상용화된 세상, 즉 디지털 공간이 일상과 밀접하게 맞물린 물리적 세계와 그 사회의 현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두 정의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술이라면 두 정의 모두에 해당되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따라서 아래 그림에서의 옅은 회색으로 표시된 ‘디지털 사회’는 위 두 정의에 따라 서술된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계 모두에서 포괄적으로 발생하는 이슈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국가가 미처 관리하지 못한 문제의 영역이 바로 디지털 사회의 ‘공백’입니다. 아래 그림과 수식은, 공백의 면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수적으로 늘어나지만, 디지털 사회문제영역에서 국가의 관리범위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므로 한계를 갖는다는 점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권력과 기술발전은 속도와 순서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공백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 [그림] 디지털 사회와 공백에 관한 개념도[그림] 디지털 사회와 공백에 관한 개념도

그림의 왼쪽은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로, 디지털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국가의 관리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으레 문제에 대한 사후적 조치를 취한다는 점, 그리고 기술발달은 국가권력작동과 비교했을 때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디지털 사회 문제의 증가폭은 오른쪽 그림과 같이 국가관리범위의 증가폭을 가뿐히 넘어설 것입니다.

디지털 사회에서의 국가잔상

디지털 사회가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가상사회 혹은 디지털 기술이 상용화된 사회라고 볼 때, 이 둘 모두를 포괄하는 예시는 사회관계망 서비스(Social Media), 메타버스, 비트코인 시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디지털 사회의 확장은 ‘공백’의 확장 역시 가속화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카카오톡’을 이용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괴롭힘 문제는 집단괴롭힘이라는 문제행동의 범주상으로 볼 때 새로운 문제는 아니지만,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소셜미디어 이용자의 증가와 함께 그 발생빈도가 커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5]

이러한 공백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당연히 개인과 개별 조직의 경계는 물론 국가공동체의 관리 범위를 뛰어넘는 초국가적 문제들이 됩니다. 이때 ‘초국가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문제가 여러 국가에 걸쳐 있다는 뜻(transnational)도 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국가에 기대해온 혹은 국가가 계속해서 수행해온 역할과 책임으로는 포섭되지 않는다는 뜻(trans-states)도 가집니다.

이 문제를 인지하고, 발견한 개인들은 이 문제 역시 ‘국가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당사자를 떠올리려고 한다면, 일차적으로는 국가의 ‘잔상’이 아른거립니다. 하지만 국가는 그 문제가 있는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수적으로, 또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는 디지털 사회의 범위와, 그로부터 비롯된 공백 속에서 국가는 그 문제를 발견할 기회와 역량이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는 이 공백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다루고 해결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을 어떻게 하면, 그리고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출현하고 사라지는 자 : 호모 바니타스의 특성

호모 바니타스에게 디지털 사회의 확장으로 생겨나는 이와 같은 공백은, 그들이 활동할 새로운 공간(space)이자 무대(stage)입니다. 요컨대 호모 바니타스는 디지털 사회 형성 이전에는 없었던 전례없는 국가주권의 진공 상태에서 출현합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호모 바니타스는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기술을 선택하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대적으로 볼때 디지털 기술로 둘러싸여 성장한 디지털 네티이브이거나, 혹은 연령 측면에서는 그에 해당하지 않지만 그에 준하는 역량을 갖춘 이들입니다. 기술의 가능성과 그것이 갖는 능력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디지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거나, 어디선가 나타난 또다른 능력자를 환대하고 그들과 연결하는 기술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호모 바니타스는 국가의 영향력과 제도에 제약되거나 종속되지 않는 성향, 혹은 제약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활동을 해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공백 속에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즉 공백을 적극적으로 공동체화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호모 바니타스는 초국가적 문제에서 국적이나 외모 등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데서 더 나아가,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지 않거나 비워두곤 합니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이러한 행태는, 호모 바니타스를 공백에서 등장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공백으로 돌아가는 자들로 정의하게 합니다. 이들의 조직력은 비밀스럽거나, 때로는 미약하고 산발적으로 나타납니다. 호모 바니타스는 끈끈한 대면 유대관계를 공유한다기보다는 디지털 기술에 있어서 상당한 숙련도를 가진 개인들 간의 일시적 연결로 구성되거나,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유사/임시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등 유동적인 형태를 지닙니다.

공백 속에서 다시 흩어지는 신인류, 호모 바니타스의 출현에 필요한 기술적 조건은 무엇일까요? 또, 그들이 활동 과정에서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는 기술은 무엇일까요?

물론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찾아갈 것입니다. 디지털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등장한 거대한 공백의 한복판에서, 지금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미래사회의 분명하고 명백한 필요가 존재한다면 말입니다.

개인별원고
국가 이후의 정치성 김채영 미래를 감히 얘기해보며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섣부르고 안일한 일이 또 있을까? 어느 누구도 감염병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우리가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다닐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여행의 꿈도, 직업적인 역량을 펼쳐보겠다는 야심도 모두 무산되었다.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고자 하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목표일 것이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가듯,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는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를 잘 유영해나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생각한다. 소소하게는 내일 어떤 디저트를 먹을지부터, 거창하게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까지 생각해본다. 땅에 몸을 딛고 살아가지만, 동시에 생각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미래는 현재와 완전히 구분된 것이 아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개념상의 구분은 존재하지만 오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이고, 아직 지나가지 않은 과거이다. 오늘이 곧 내일이 되고 어제가 된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 또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직시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우리는 삶을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한다.

이번 토론회에서 우리가 생각해본 미래의 ‘디지털 사회’의 모습 역시, 현재로부터 비롯되는 얘기이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빅데이터와 같은 용어들이 어느새 익숙해진 만큼, 디지털 사회는 점점 그 영향력과 규모가 커지고 있다. 물물교환의 시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상화폐로 한 개인의 인생은 ‘떡상’하기도, ‘떡락’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카카오톡에서의 사이버 불링부터 텔레그램에서의 반인륜적인 범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폐해는 이미 개인의 범위를 넘어섰다. 그렇기에 디지털 사회의 팽창 가능성과 미래의 가능 양상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데,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모 양상 역시 쉽게 예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시대를 막론하고, 시간성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사회도 ‘사회’인 만큼 인간들이 모여서 구성되는 것이고, 인간이란 무릇 모여 살 수밖에 없지만 모여 살면 문제가 발생하는 종족이다. 이러한 역설에서 꽃 피어난 ‘정치적’ 상황과 ‘정치적’ 문제 속에서, 그 문제의 해결 주체를 생각하며 우리 조에서 제시한 개념이 “국가 잔상”과 “호모 바니타스”이다.

국가라는 잔상?

국가는 미래에 어떤 형태로 존재할 것인가.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국가가 행사하는 '국가권력'과 구체적 기관으로서의 '정부'로 구분해본다면, 먼저 권력의 측면에서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푸코(Foucault)는 18세기를 기점으로 국가권력의 형태가 ‘훈육권력’으로 변화했음을 계보학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 이전에는 단순히 범죄 행위를 처벌했다면, 근대의 국가권력은 범죄를 저지른 개인의 ‘비정상적인 인격’ 자체를 처벌하는 것으로, 즉 개인의 신체와 품행을 규범적인 사회 질서에 맞게 ‘정상화(normalization)’하는 것으로 변형됐다는 것이다.[6] 이와 더불어 근대국가는 대규모 인구의 생명 자체를 관리하는 ‘생명권력’을 주요 특징으로 지닌다.[7] 보다 최근의 사례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국가 형태는 어떨까. 세계화 시대와 더불어 초국가적인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며 국가 역할의 축소를 논하는 담론이 확산되어왔지만, 최근 코로나 감염병을 겪으며 국가권력은 오히려 확대된 듯하다. 감염병의 창궐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은 감염병의 통제 및 관리라는 명목 아래에 국가권력이 단기간에 급속도로 확대되기에 좋은 환경이다. 특히 디지털 사회에 걸맞게 국가권력의 확대는 기술과 접목되어 이루어졌다. 어디를 가든 QR코드의 스캔이 의무화되면서 나의 동선은 시시각각 기록되었으며 이에 발맞춰 카카오톡은 QR코드의 스캔이 쉽도록 앱 내부에 배너를 빠르게 만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권력은 디지털 사회와 그리 유리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미래 사회에서의 국가권력의 형태를 섣불리 예측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국가가 모든 것에 손을 뻗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구체적 기관으로서의 정부는 모든 곳에 있지 않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그랬듯, 매년 노동 현장에서 몇천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이후에 그랬듯, 국가는 항상 사건 이후에 나타나거나 그 이후에마저 부재한다. 후에 어떤 대처가 이뤄지더라도, 참사는 이미 발생했으며 당사자 개인에게는 지우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디지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술발전과 함께 디지털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든, 그 사회에서 역시 발생할 문제에 대하여 국가는 사건 현장에 늦게 도착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국가에 대한 ‘잔상’이다. 국민을 보호해준다는 근대국가의 이념 아래, 우리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국가가, 혹은 정부가 어디 있었냐고, 뭘 하고 있었냐고 묻고 따지지만 이는 그저 국가가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우리가 지닌 잔상에 불과하다. 그 아른거리는 잔상을 헤치고 나가보면 드러나는 ‘공백’의 자리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새로운 사람들(people)과 새로운 공동체

현재의 우리가 지닌 국가에 대한 이념은 근대적인 것에 불과하고, 앞으로 국가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하겠지만, 그러한 변동과 무관하게 이 땅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살아왔다. 근대국가의 체제에서 이들은 ‘국민’이라 불렸지만(특히 한국적인 맥락에서는 더욱), 국가가 잔상에 불과한 것이 될 미래의 디지털 사회에서는 이들을 호명할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국민 이전의 사람들/인민들(people)에게 부여할 이름이.

그렇다면 먼저, 국민이라는 존재가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듯이 새로운 사람들도 ‘공동체’를 구성하는가? 공동체를 이루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공동체 의식’을 꼽아본다면, 이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가 된다. 과거에는 개인이 살고 있는 일정 지역 내에서 타인/이웃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의 공통의 경험과 인종적, 언어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에서는 완전히 다른 관계 양상이 펼쳐진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의사소통은 지역성의 한계를 뛰어넘기에 ‘같은 지역’에서 도출되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던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 형성은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온라인의 ‘커뮤니티’ 내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익명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은 더욱 원자화된다.

그러나 각자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 즉 공적 주체라는 의식은 함께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 공동체 내의 정치적 문제는 필연적이고, 그 해결 역시 정치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행하는 시위를 그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혹은 나의 일상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공동체는 유지되기 어렵다. 한 공동체 내에서 자원은 어떻게 배분할 것이며 자원 분배에서 소외된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 운동 및 그들의 존재는 어떻게 비가시적인 것에서 가시적인 것으로, 공동체적 담론으로 등장할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기존 질서에 어떤 변형을 가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다양한 양태로 변주되어 등장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을 야기하며, 이에 대하여 구성원들 간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이들이 합의하거나 불화하는 것이 정치적 과정이다. 정치성이 소멸된 사회는 곧 죽은 사회이며 그 구성원들에게 공적 주체라는 의식이 부재한 공동체는 곧 죽은 공동체이다.

우리가 제시한 ‘호모 바니타스’라는 ‘새로운 사람’은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공적인 주체이다. 디지털 사회에서도 분명 사회적 문제는 발생한다. 우리가 최근 목도한 N번방 사건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죄/문제를 그저 방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추적단 불꽃'이라는 이름 아래에 공백의 자리를 채운 것은, 이를 자신의 공동체 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자신을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주체화하는 의식을 지녔기에 가능했다. 이들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 즉 디지털 사회에서도 공적 주체라는 의식을 지닐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저 한 개인의 '휴머니즘', 혹은 인류애에 기댈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 공백의 자리에서 다시금 정치성을 찾는 것, 그리고 복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 사회의 또다른 '정치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사회의 해체 윤선혜

그 어떤 사회에도 속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하는 것에 비해 인간 존재와 그토록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사회를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사회’라는 말의 반대항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를 짐작해보자. 사회는 대개 ‘개인’ 혹은 ‘자연’의 반대항으로써 쓰인다. 즉 개인이 할 수 없는 영역이나 사람의 인위적인 힘으로 구성된 영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공간의 범위를 개인에게 내면화하고 그 범위 안에서 암묵적으로라도 상호작용의 법칙을 설정하는 것은 주로 사회만의 고유한 영역이 되어왔다. 이는 국가와 같은 명확한 기구가 담당하기도 했고, 문화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언어가 정확하게 꼬집지 못한 채로 모호하게 존재하기도 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10년 뒤의 사회를 상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일단 지금의 세계에서부터 징후를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가치와 상호작용 양식이 과거와는 다르게 변화하기 시작된 지점을 몇 가지 포착할 수 있다. 이 변화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인 토대가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우리가 무시할 만한 것 또한 아니다.

첫째로, 이타성의 영역이 모호해지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선악 중 무언가로 규정하든지 간에, 사회가 더불어 살아가는 영역으로 규정되는 이상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억누르고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 장치가 마련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어떻게 존재하고 관계 맺는지에 관한 문제는 역사에 따라, 혹은 문화에 따라 개인주의나 공동체주의 등의 이름으로 불리곤 했지만, 공동체 도덕이 그 힘을 잃고 법만이 거의 유일한 규범으로 작동하는 상황은 그러한 구분에 포섭되지 않는다. 맥락에 대한 고려보다 절차적 정의를 우선시하는 기조는 약한 사회적 신뢰와 법의 공정성에 대한 환상과도 맞닿아있다. 모두가 스스로가 약자라는 피해의식에 젖어 약자 배려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여 형식적 정의만이 중시되는 배경에는 결국 ‘먹고 살기’라는 생존 자체가 하나의 주의(主義)가 되어야만 할 정도로 각박한 파이 게임이 있다.[8] 생존주의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새로운 현상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팽창적 산업 발전이 끝나고 기술 사회 시대로 접어든 전세계가 사회적 생존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꿈꾸는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규범이 힘을 잃고 그 자리를 절차적 법규범이 차지한다고 한들 법규범이나 법권력이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으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변화는 바로 디지털 기술로 인해 기존의 전통적으로 세계를 유일하게 구성했던 물질적 세계가 후순위로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체감하고 있을 공백이다. 물리적 세계는 이제 가상적 세계의 매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가상적 세계로 인한 대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간단한 행위에서조차 가상세계는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온라인 미팅 등의 기술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매우 쉽게 생활화되었다.

물론 디지털 기술이 물질적 세계로서의 사회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물질적 기반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물리적 제약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적 세계가 더 주목 받고 더 높은 중요성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비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사회가 시사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로는 통합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와 규칙들이 기술 발전에 힘입어 등장했다는 것이다. 점점 더 확장될 것이 자명한 새로운 세계의 등장으로 인류의 주체성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을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물질세계에서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면 미래 사회에 대한 질문의 무게는 사뭇 달라진다. 사회는 여전히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일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를 ‘사회의 해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계속해서 물리적으로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인가, 혹은 비물리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방식의 관계와 규범을 가지게 될 것인가? 이는 기존의 사회질서로부터 어떤 공백을 창출할 것이며, 이러한 사회에서는 어떤 존재가 각광받게 될 것인가?

디지털 사회의 공동체성 – 디지털 사회는 사회인가?

사회의 해체를 논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디지털 사회 또한 사회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사회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조건에 맞게 진화하는 것일 뿐, 사회 해체라는 불필요하게 거창한 수식어까지 붙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 글의 목적은 사회의 해체를 단언하고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 해체라는 말은 사회라는 것의 소멸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그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가 사회인지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우리는 몇 가지 지점을 점검해야 한다. 디지털 공간만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특성은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 개념뿐 아니라 디지털 사회의 별난 면모까지도 대략적으로 훑어볼 수 있다.

디지털 사회가 전통적 사회와 달리 가지고 있는 유별난 점 중 하나는 비물질성으로 인한 익명성이다. 우리는 엄연히 몸으로서 존재하지만 디지털 공간이 열리면서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을 통해 몸을 초월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가짜’는 아니다. 예컨대 인터넷에서 소녀를 연기하는 중년 남성의 경우 그의 물질적 몸은 소녀의 것이 물론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만들어지고 활동하는 소녀는 엄연히 캐릭터로서 존재한다. 여기에 만약 이 인물이 소녀를 연기하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가면을 쓴다. 홀로 일기를 쓸 때에도 그에 걸맞는 가면을 착용하므로, 가면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그 캐릭터가 가짜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로 인한 가면은 물질적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서 매우 완벽하고 감쪽같이 작용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원래는 가면을 통해 얼굴만 바꿔끼울 수 있을 뿐 그 밑의 몸은 고스란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드러났었다면, 이제는 그 밑의 몸조차 상상할 수 없는 감쪽같은 가면이 디지털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꾸며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내보일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자아라는 개념에 큰 균열을 낸다. 이는 인터넷 페르소나가 무결하다는 말이 아니라, 익명성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사람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기는 하는지에 대한 가시성을 흐려버린다는 뜻이다.[9] 놀이터에서 사귄 친구와 온라인 SNS상에서 사귄 친구에게 각각 비슷한 수준의 친밀도를 느낀다고 하자. 놀이터에서 사귄 친구에 대해서는 그의 외모와 말투, 표정, 본명, 집 주소 등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온라인 친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가 어떤 식의 온라인 페르소나를 구축했는지에 따라 같은 친밀도여도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종류에는 매우 큰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물질적으로 함께 있지 않아도 그에 못지않은 친밀감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연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호작용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면, 디지털 공간은 자아를 새롭게 규정하고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즉 새로운 상호작용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관장한다는 점에서 사회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 디지털 공간에서 우후죽순 생겨나는 문제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다. 기본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심층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행동 양식을 규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규제해야 하는 국가가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국가의 행정이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는 종래의 명제는 디지털 사회의 출현으로 인해 유지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디지털 사회의 파수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질서를 만들고 그를 상징하는 의례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디지털 사회의 경우 국가가 아니라면 누가 통제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떤 주체가 디지털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미지의 미래 사회에서도 한 가지 예측 가능한 것은 새로이 만든 규칙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디지털 사회에서 지배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토템이 종교적 사회에서 집단 구성원들을 결집시키는 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듯[10], 그리고 ‘스타’라고도 불리는 각 장르의 유명한 인물이 현대 사회에서도 애정으로 구성원들을 결집시키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듯 디지털 사회에서도 그러한 아이콘이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이렇다 할 질서가 없이 자유로이 흩어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산발적으로 디지털 사회를 하나로 모으는 매력적인 상징이 존재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공백 인간 ‘호모 바니타스’의 존재는 디지털 사회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 호모 바니타스를 낳은 것은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공백이지만, 호모 바니타스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원동력은 그가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에서 올 것이다. 디지털 사회에 숙련된 자로서 그들이 십분 활용하는 익명성은 호모 바니타스라는 상징에 신비성을 더해줄 것이다. 그들이 세속적인 목적에서 활동을 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활동은 정의롭고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호모 바니타스는 초개인적 국가를 뛰어넘은 개인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는 전통적으로 개인들로부터 주체성을 양보 받아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도맡아 해왔다. 그런데 호모 바니타스는 존재 자체로 이러한 국가의 성격을 부정한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모두 처리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주체의 부재 속에서 호모 바니타스는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개인의 역량 안으로 전복해서 포섭한다. 개인을 초월한 국가를 다시금 초월한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둘째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등장했다가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그들의 행보는 순수한 선으로 읽히기 쉽다. 그들이 실제로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나 금전적인 이유로 움직이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이 보기에 그들은 혜성처럼 반짝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사라진다. 그들이 활동한 자리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고 그들의 이름만이 남는다. 분명 물리적 세계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으로 존재하는 게 틀림없는 그들은 디지털 사회에서는 익명성을 자유자재로 이용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역설적으로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디지털 사회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상징이 그렇듯 호모 바니타스 또한 그 상징적 의미를 영구히 유지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디지털 사회의 문제를 발굴하는 그들은 상징이 됨으로써 디지털 사회의 수명을 탄탄하게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호모 바니타스라는 존재는 본래 정보값을 가지지 않는 무(無)의 사람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이게끔 스스로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보가 적발되는 일이 생겼을 때 사회적 상징과 그로 인한 사회적 생각에 금이 갈 확률도 높다. 그럼에도 호모 바니타스라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디지털 기술이 열게 될 미래 사회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논의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공백, 공백에 존재하는 사회적 욕망, 그리고 Homo Vanitas 서영찬 공백에 대한 논의: 사회에 존재하는 공백이란 무엇이고, 공백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공백을 정의하기에 앞서서, 국가의 관리범위와 역량에 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국가의 관리 범위와 역량을 알아야 공백의 크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의 범위는 커질 것이고 이 속도는 시장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국가는 과학기술에 관한 규칙을 만들고 감시를 하는데 이것이 국가의 관리 범위 및 역량이다. 사회의 범위에 국가의 관리범위를 뺀 크기를 우리는 공백의 크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를 간단한 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공백 (Void) = V, 사회 (Society)의 범위 = S, 국가 (Government), 의 관리범위&역량 = G, 시장 (Market)의 크기= M, 시간 (time) =t 라고 하자. 공백의 크기 V (t) 는 다음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V (t)] = [S (t)- G (t)]

사회의 범위 S (t)는 무엇에 영향을 받을까? 시장경제에서는 시장의 크기 M(t)가 사회 규모 S 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단, 국가의 역량이 시장의 크기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칠테지만 이 부분은 고려하지 않았다.)

[V (t)] = [S(M(t))- G (t)]

공백의 크기 V (t)는 일정하게 증가할까? 공백 크기의 증가율 V'(t)은 달라질까? 위 식의 양변을 시간 t에 대해 미분하면 다음과 같다.

[V '(t)] = [{S(M(t))}'- G' (t)] = [M'(t)*S'(M(t))- G' (t)]

즉 이 식은 공백의 증가율 V '(t)를 나타낸 식이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그림1[그림1] 시간에 따른 사회와 국가 범위의 증가

위 그림에서 사회 범위 증가율 {S(M(t))}' 과 국가 관리 범위 증가율 G' (t)이 일정하며, 각각의 증가율은 양의 값이다. 국가의 관리 범위 증가율 G' (t)가 일정 할 때, 인공지능 같은 신기술이 나와 시장 증가율 M'(t)이 커진다면, 시장의 크기 M(t)도 증가할 것이고 따라서 사회 범위 증가율 [M'(t)*S'(M(t)] 도 커지게 될 것이다. 즉, 국가의 관리 범위 증가 속도 G' (t)는 일정하지만 [M'(t)*S'(M(t)] 가 커져 공백의 증가율 V '(t)이 커질 것이다.

반대의 상황은 어떨까? 코로나 같은 사회의 위기가 생기면 시장 증가율 M'(t) 는 감소하며, 시장의 크기 M(t) 는 평소보다 적게 증가하거나 일정하거나 감소할 것이다. 이에 따라 S'(M(t))는 조금 증가하거나 일정하거나 줄어들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사회 범위 증가율 {S(M(t))}' 은 줄어들 것이고 이때 국가의 관리 범위 증가율 G' (t)이 일정하여 (정부에 속한 공무원의 수는 일정하기에 G' (t)는 일정할 것이다), 공백의 증가율 V '(t)이 줄어들 것이다. 즉, 코로나라는 상황에 국가 통제가 심해지고, 국가 권력이 커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식3)에서 우변의 첫째 항인 사회 범위 증가율 M'(t)*S'(M(t)) 이 작아지고 국가의 관리 범위 증가율 G' (t)가 일정하여, 공백의 증가율 V '(t)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 그림2[그림2] 시간에 따라 커지는 국가와 사회의 범위가 달라지는 두 경우

위 두 그림에서 G' (t)는 일정하지만, M'(t)*S'(M(t)) 가 달라질 수 있다. 왼쪽 그림은 신기술에 의해 시장 증가율 M'(t)이 커지고 공백 G'(t)이 커져보이는 경우, 오른쪽 그림은 코로나 같은 역병에 의해 공백증가율 G'(t)이 작아지는 경우이다.

디지털 과학기술은 공백의 크기 V (t)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첫째, 과학기술, 특히 이동통신 전기전자 기술분야가 발전할수록 국민 정체성이 약해질 수 있고 이에 따라 국가의 역량 G 은 줄어들 수도 있다. 이정동 교수님의 ‘최초의 질문’ 이라는 책 85페이지에 의하면, 조직이 커질 수록 외부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없다 라고 한다. 이는 국가와 국가간에도 해당이 될 것이다. 국가를 이루는 개인의 정체성은 언어, 문화, 물리적 거리 등으로 제한이 되고 경계내에 존재하게 되었다. 다양한 감각기관(시각, 촉각,..)을 공유하는 Metaverse 기술, 인종 및 국가를 이어줄 수 있는 의사소통 platform, (NLP기술이 발달함에 따른)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번역/통역 기술의 발달 등이 이러한 국가간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국민 정체성은 모호해질 것이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정체성이 옅어질수록 국가에 대한 헌신 및 충성도는 줄어들 것이며, 국가의 역량 G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즉, 국가의 관리 범위, 국가의 역량 G 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 그림3[그림3] 과학기술에 의한 국민 정체성의 약화

둘째, ‘인공지능’이라는 범용기술이 그림 2 (위) 와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즉 인공지능이라는 디지털 범용기술이 공백 증가율 V'(t)을 일정 크기만큼 크게 만들 것이고, 이에 따라 우리는 공백의 크기 V(t)를 크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양상은 변할 것이다.이정동 교수님의 책 < 최초의 질문> 196페이지에 의하면, 인공지능 기술은 범용기술이며, 일반적으로 범용기술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면 세상의 규칙이 바뀐다라고 한다. 즉, ( 국가 관리범위 증가율 G'(t)이 일정할 때) 새로운 범용기술인 인공지능 기술이 나타나서 M'(t)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회 범위 증가율 [S(M(t))]'이 증가하여 공백 증가율 V'(t)이 커질 것이다. 국가는 생존을 도모하고 다시 자신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국가의 관리범위 증가율 G'(t)이 사회 범위 증가율 [S(t)]'를 따라잡을 것이다. 공백 증가율 V'(t)이 증가했다가 감소한뒤 일정해진다는 것이다.

Homo Vanitas에 대한 논의

과학기술은 항상 양면성이 존재하며, 과학기술의 이점과 위험성을 적절히 trade-off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불의 경우 닿으면 화상을 입는 등 위험성이 존재하지만 인류 발전의 시초가 되었다. 원자력 발전의 경우 전력 에너지 공급을 탄소배출없이 가능케하지만, 방사능에 의한 방사선 피폭의 위험이 존재할 수 있고, 백신의 경우에는 부작용의 위험이 있지만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과학기술의 양면성으로 인한 단점은 새로운 과학기술로 극복/ 해결할 수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욕망을 이루어주게 하는 도구라는 특성도 있다. 자연 법칙을 이용해 만들어진 과학기술을, 우리 인간은 도구로 활용하며 인간의 욕망을 해소한다. Homo Vanitas는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적절히 고려하면서 공백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의 욕망을 해소할 것이다.

Homo Vanitas는 국가의 관리범위와 사회의 차이인 공백에 위치한 사회적 욕먕을 “과학기술이라는 도구로” 이루어주는 존재이다. 사회 욕망의 크기가 클수록, 그 욕망을 실현해야할 시급성이 클수록, 그 욕망의 내용이 명료하고 구체화 될수록, Homo Vanitas가 해결해야할 대상인, 공백에 위치한 사회적 욕망에 가까울 것이다. Homo Vanitas는 개인일 수도 있지만 집단일 가능성이 더 높다. 과학기술의 복잡도가 증가함에 따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일 가능성이 더 높기에 Homo Vanitas도 개인이 아닌 집단이거나, 집단을 활용할 수 있는 개인일 것이다.

Homo Vanitas는 왜 공백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가? 국가의 관리범위에 있는 개인/조직이 사회의 욕망을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정부의 관리/ 감시를 받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고, 의사결정,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관리범위 밖에 있는 존재가 Homo Vanitas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들이 언론등을 통해 사회에 드러나게 될 경우, Homo Vanitas들은, (사회의 욕망을 해소해주지 못할 경우) 사회의 압력혹은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정치인들의 접근 등으로 인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몰락 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Homo Vanitas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사회에 드러나지 않은 형태가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들이 사회적 욕망을 해결하면, 사회적 욕망의 해소라는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그들은 공백, 무 (無)로 돌아간 것 처럼 보일 것이다.

공백에 존재하는 사회적 욕망의 실현 과정: 민주적 진행

사회적 욕망은 해결해야할 시간적 유예에 따라 초단기적문제, 중장기적 문제로 나뉜다. 초단기적 문제는 N번방 사태 같은 유형의 범죄, 코로나 같은 역병이 있다. 중장기적 문제의 경우 각 분야에 존재하는 Unmet Needs (충족되지 않은 니즈), 빈부격차, 이념 갈등 같은 사회적 갈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Homo Vanitas 가 이러한 욕망을 해결할때 기존의 과학기술을 사용하거나, 새로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과학기술을 사회에 적용할 것이고, 이러한 과학기술을 발전,사용, 사회에 적용에서의 각 진행과정마다 민주적으로 의사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백에 존재하는 사회적 욕망의 시급성에 따라 민주적 절차가 달라질 수 있다.

과학기술을 우리 사회가 수용할 때 여러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일반인, 이해당사자 및 전문가, 국가를 나누어서 생각해보자. Homo Vanitas가 제시한, 사회적 욕망의 실현에 대한 의견을 사회가 어떻게 수용할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그림4[그림4] 사회내에 존재하는 국가와 공백에 존재하는 이해당사자 및 전문가, 일반인
  • 그림5[그림5] 초단기적 문제의 경우, 이해당사자 및 전문가가 Homo Vanitas가 될 것이고, 국가가 최종 의사결정자가 될 것이다.
  • 그림6[그림6] 중장기적인 문제인 경우, 시간에 지남에 따라 일반인의 과학기술에 이해도가 증가하기 때문에 모두가 Homo Vanitas가 될 수 있다.

초단기적 문제의 경우,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독단적으로 결론 지어 사회적 수용을 결정할 수 밖에 없다. 이 때 공백에는 전문가 집단 혹은 이해당사자로 구성된 여러 집단 혹은 개인에 의해 다수의 의견이 존재할 것이며, 이러한 의견은 쉽게 범주화되어 분류될 것이다. 국가가 (국가로부터 의사결정권을 받은 실무진이) 사회에 존재하는 욕망(주로 명확한 문제)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최종 의사결정을 빠르게 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형태로 보일 것이다. 국가로부터 선택받은 의견을 제시한 집단/ 개인은 사회의 욕망을 해결할 것이며, 그들이 Homo Vanitas일 것이다.

중장기적 문제에 관한 경우, 전문가 및 이해당사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의견을 제시할 것이고, 개인혹은 집단이 제시한 의견이 범주화 됨에 따라 그 범주에 속한 개인/집단들은 자신들의 의견들을 하나로 정리할 것이다. 이렇게 범주화된 의견에 따라서 그룹이 형성되며 그룹간의 상호작용, 그룹과 국가간의 상호작용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있는 사회의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에서는 숙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바람직 할것이다. 이 경우 의견을 제시한 모든 그룹이 Homo Vanitas라고 넓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존재하는 기술사회의 공백 속 놀이터 김정현 기후 위기와 디지털 기술 발전의 유사점

2022년 8월 어느 날 강남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그 날 봤던 소식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신림동 펠프스’도 ‘서초동 현자’도 아닌 경기도 광주에서 찍힌 영상이었다. 갑작스레 차오른 물로, 도로 옆 버스정류장에서 한 여성이 정류장 봉을 잡고 있다가 결국 떠내려갔다. 영상에서는 이를 촬영하던 이들이 연신 어떡해, 어떡해라고 하는 말이 들린다.

기후 위기의 특징은 예측불가능성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양상으로, 어떤 수준으로 일어날지 모른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이 불과 1-2분 사이에 도로변으로 자기 키높이까지 급류가 차오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앞으로 벌어질 기후 위기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는 것은 얼마 뒤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수도권 침수사태 며칠 후 포항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주민들에게 “폭우로 주차장 침수 가능성이 있으니 차량 이동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을 듣고 주차장에 차를 옮기러 내려 갔다가 8명이 주차장 침수로 사망했다. 그들은 분명 수도권 일대의 폭우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를 빼는 사이에 주차장이 죽음의 수영장으로 바뀔 것이라고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예측불가능한 위기 앞에서,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디지털 기술발전은 이와 같은 기후 위기를 닮았다. 물론 둘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날씨가 더 나빠진다고 해서 디지털 기술 변화를 직접적으로 가로막을 것 같지 않다. 혹은 디지털 기술의 변화 양상이 기후 위기를 단시일 내에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둘은 인간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걷잡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고, 우리 삶을 예측불가능한 영역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디지털 기술에 의한 위협은 그 이용편익에 비례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한달 쯤 전인 2022년 8월 ‘제2의 N번방’이라고 불릴 만한 온라인 성범죄 피해가 몇몇 언론에서 보도되었다. 그러나 몇년 전 첫 N번방 범죄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만큼 반향이 크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지고, 관련 기관의 수사역량이 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이제 그런 범죄가 너무 만연해서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범죄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둔감해진 것일 수도 있다.

범죄 피해를 원천차단하려면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지털 기기 사용을 막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인류의 역사는 도구를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과정의 역사이기도 하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단순한 업무 도구, 편의를 증진시키는 용도를 넘어서서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멀쩡한 신체 일부를 어떻게 잘라낼 수 있을까. 예컨대 카카오톡 없이 친구와 약속을 잡는 것이 가능할까?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가족, 친구, 직장 동료의 번호가 적힌 수첩을 늘 전화기 옆에 두거나 몸에 지니고 살았다. 전화로 대규모 약속을 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학교, 회사, 친목회 같은, 날 그 자리에서 정기적이고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구식의 모임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인터넷이 생존의 기본 조건이 된 이제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창구가 온갖 플랫폼 서비스와 유튜브 채널의 숫자만큼 다양해졌다. 대면 기반의 구식 모임이 쇠퇴해가는 것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다. 네트워크의 양상이 예측불가능하게 종횡으로 경계를 뛰어넘어 확장되면서 결과적으로 국가나 플랫폼 운영 기업 같은 거대 조직이 개인을 통제하는 것도 어려워졌지만, 개인 스스로도 수많은 채널을 통해 유입되는 여러 영향력으로부터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편의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로 인한 취약성을 알고도 거부할 수가 없다. 각종 서비스에 가입하면서 제공한 개인정보 유출이 너무 빈번하게 이루어져서 우리 가족 이름을 모두 알고 있는 보이스피싱 전화가 걸려와도 ‘도대체 내 번호랑 이름을 어떻게 알아낸 거야?’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늘 사용하는 클라우드에는 민감한 사생활이 담긴 자료가 엄청나게 많을 텐데, 그것이 유출되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가끔 좀 꺼림칙하지만 기업의 균형잡힌 이익추구를 기대하고 보안 기술을 신뢰하며 서비스 사용을 통해 나의 편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뿐이다,

N번방 사건이나 일상화된 보이스피싱 범죄를 포함하여 기술과 관련된 위협적 현상들은, 디지털화한 우리의 정보 혹은 디지털 세계로 확장된 우리의 의식과 신체가 외부 공격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모든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그 사용은 모두의 편익을 위해 기업과 국가, 개인이 노력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기술에 의한 위협은 그 이용편익에 비례하여 함께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걷잡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우리가 기술 자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러한 변화는 걷잡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다. 변화는 위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능한 논쟁점들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고, 더러는 예측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량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서 쓸모를 찾는 알고리즘 기반 산업이 경제 구조를 뒤바꾸고 있다. 현재 이용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알고리즘 기반의 수익모델을 만드는 기업은 사실상의 독점 기업이 되고, 나머지 기업들은 도산하거나 그러한 독점 기업의 지배 생태계 내에서 살 길을 찾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사기업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국민건강보험이 보장성을 강화하고 급여지출을 효율화하기 위해 전국민의 수십 년에 걸친 진료기록을 가지고 인공지능 기반 데이터 분석을 실시하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자료 분석은 이름과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제거하고 익명 기반으로 진행한다. 사실 이 정도 자료 분석은 이미 건강보험관리공단도 실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보험공단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료기록을 바탕으로 개인의 건강상태를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 그에 맞게 보험료를 차등화한다면 어떨까? 또는 유전자정보를 제출한 사람들에게 보험료를 50% 할인해주겠다고 한다면 어떨까? AI 기반 데이터 예측모델의 높은 정확도를 생각한다면 분명 이러한 조치들이 보험재정을 더 튼튼하게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고 깊은 의료보장을 제공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찜찜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범죄를 예측해서 ‘미래의 용의자’를 미리 잡아들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학습패턴을 분석해서 아이의 진로를 열 세살 때 미리 결정하는 교육 시스템은 어떨까? 메타버스가 많이 발달하고 있는데, 교정 시설 운영과 수형자 관리비를 줄이기 위해 수면 마취와 VR을 결합한 메타버스 감옥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술 발달 자체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윤리적 고려, 혹은 사회 제도의 수준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진다. 특히 디지털 기술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의식에 직접 침투해서 윤리나 제도를 건너뛰고 곧바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 20여년 전부터 ‘사이버 공간’은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고, 그 영역은 앞으로 점차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술과 제도 사이의 틈새를 허용하자

중요한 것은 걷잡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기술적 변화에 대응해 우리가 사회적으로 무엇을 준비할 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개인의 수준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라는 제안은 공허하다. 개인은 이미 디지털 사회의 명암 속을 분주히 오가며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로부터, 가장 넓게는 국가기관, 기업, 또는 영향력 있는 사회적 매개체들이 이러한 역동에 어떻게 관여하고 길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호모 바니타스가 등장하는 이유는,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는 데 반해 사회, 그 중 특히 국가의 영향력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모든 영역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디지털 기술에 의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가정하고, 결국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들의 우선순위를 정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안보에서는 정보보안과 해킹 대응역량이 다른 안보 이슈를 뛰어넘어 가장 중요해질 것이다. 경제에서는 디지털 금융과 알고리즘 기반 산업구조로의 전환이 핵심 화두가 될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언어와 국경을 초월한 에이전트의 등장과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은 집단간 교류 또는 충돌 흐름이 지배적 양상이 될 것이다. 교육은 학습자에게 효과적인 디지털 문해력을 평생에 걸쳐 제공하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다. 국제관계는 이 문제들 모두와 관련된 기술 패권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등등.

공백 속 놀이터를 응시한다면

이러한 의제들을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완벽히 예측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곳은 제도와 기술 틈새에 서식하는 수많은 호모 바니타스들의 놀이터다. 제도와 각 분야는 이들이 더 잘 활동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

관련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호모 바니타스는 돈에 관심이 없다. 호모 바니타스의 이해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 자경단, 취향기반 네트워크, 일확천금을 노리는 기회주의자, 그게 뭐가 됐든 예를 들자면 추적단 불꽃과 같은 이들과 공식적인 기관, 사회단체간의 협업이 일상화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기존의 조직들은 당면한 문제 해결에 늘 그러한 옵션을 둘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혼란과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이들이 눈에 잘 포착되도록 관련 기업간 또는 국제적 공조에 대비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2022년 10월 현재 한국은 2001년 처음 채택된 국제 사이버 범죄 조약에 아직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부터 출발해야 하고, 이런 문제부터 다루더라도 국가는 물론 크고 작은 사회 단체들이 당장 진행할 수 있는 과제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호모 바니타스의 존재에 주목한다는 것은, 디지털 세계에 발을 두고 시선을 미래로 돌린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에 시선두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호모 바니타스의 출현과 그들의 존재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가 조금 더 수월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까닭도 없다. 바니타스 속을 거니는 우리 모두는 신인류로 우화할 잠재력을 가진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기술과 현실 사이에는 늘 공백이 존재한다.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변화를 포착하고 반발 앞선 미래를 이끄는 일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때 디지털 세상의 균열과 공백은 더 이상 위기와 위협이 아닌, 새로운 기회를 포착할 진짜 놀이터가 될 것이다.

  • AI페인팅 DALL·E 2로 그린 공백 속 놀이터AI페인팅 DALL·E 2로 그린 공백 속 놀이터. (Created with DALL·E & Kim Junghyun, “An oil painting depicting a playground in the middle of an empty space outlined with stard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