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 #머스크, 뇌 업로드
- #피셔, 첫 디미그레션
- #노바, 첫 디미그레이션
- #피셔, 방송국에서
- #프루드, 답장을 기다리며
- #지미, 마지막 방송
- #캡틴, 탐색선에서
- #노바,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상상이라는 GPS를 이용해 미래라는 우주를 항해할 것이다. 미래는 우리의 힘으로 능동적으로 끌고 와야 하는 것이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많은 접근이 있다. 지금의 연구를 바탕으로 가까운 미래를 본 논문도 있으며, 미래를 탐구하는 전문가가 미래를 가시적으로 그린 예측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결국 픽션이다. 영화 Her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까지, 과거의 상상은 많은 부분 지금의 현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의 상상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인류의 미래는 상상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그 상상의 원천 자리에는 언제나 재미가 있었다. 나아가 상상은 미래를 끌고 오는 인력을 가진다.
2022년의 지금, 디지털 기술은 아직 인류의 가장 큰 한계인 죽음을 뛰어넘지 못했다. 물론 디지털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죽음을 바꿔 놓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인간의 기대수명은 40을 넘지 못했지만, 그것은 병들어 죽어갔던 사람들 때문이다. 운이 좋게 병에 걸리지 않고 살았던 사람은 지금처럼 70~80대까지도 살았다. 거의 500년전에 태어난 조선시대 21대 왕 영조는 81세에 사망하여, 지금으로서도 호상이라 할 수 있는 나이에 죽었다. 디지털이 우리에게 오며 많은 기술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우리 인류는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물론 디지털은 우리의 수명을 연장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늘려줄 것이다. 그러나 0과 1만이 존재하는 디지털의 관점에서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죽음에 끼친 영향은 여전히 0이다. 여전히 인간은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극복해야 그 영향이 결국 1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죽음의 극복, 혹은 이른바 “죽음의 죽음”을 실제로 목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어차피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죽음의 죽음”에 대해 논의하고 상상해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놀랍게도 일부 사람들은 벌써 죽음의 극복을 진지하게 학계와 산업계에서 논의하고 있다. 2020년의 M cundra는 Immortality라는 책을 썼다. 2013년에 설립된 캘리포니아 생명 기업(California Life Company)의 약자를 딴 Calico는 안티에이징의 비밀을 밝혀, 인간의 수명을 500세로 연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며 궁국적으로는 죽지 않는 인류, 불사신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미 2014년에 한화 약 1조 8000억원 가량의 투자를 받았으니 죽음의 죽음에 대한 상상이 아주 의미 없다고 할 수 없다. 당장 우리의 삶의 시간 안에서 죽음의 죽음을 맞이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양한 형태의 상상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의 학계와 산업계에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 세계로의 이민, 디미그레이션을 상상했다. 인간의 한계를 정말로 극복해 디지털 유토피아, 디지토피아에서 사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우리에게 너무도 먼 미래라서 일부 독자는 그 의미를 바로 실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와 가까운 시기부터 순서대로 디미그레이션의 역사, 디미그레이션의 발전과정을 보여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디미그레이션의 세상을 살아갔던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위는 인류 최초의 디미그렌트(Dimmigrant)라고 할 수 있는 머스크에 관한 2062년 기사다.
아주 먼 과거 21세기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를 소유했던 개인 머스크는 본인의 뇌를 네트워크에 업로드하는 것을 최초로 시도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뇌를 업로드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18세기 월트 디즈니를 필두로 21세기까지 전 세계에 약 100,000여 명이 불치병에 걸려 본인을 냉동인간 형태로 만들 생각은 했지만,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뇌를 네트워크에 업로드 해 놓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스크는 만약 뇌가 1000억개의 뉴런과 100조개의 시냅스가 만들어내는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면 그 전기 신호를 디지털 네트워크에 업로드 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뇌를 냉동 상태로 보관하려는 시도는 했으나, 살아있는 뇌를 네트워크 형태로 백업하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머스크의 시도는 의미가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는 많은 조만장자들이 죽음 직전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의 뇌를 네트워크에 백업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이것이 디미그레이션의 초창기 형태였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구체적인 디미그레이션 구현 기술은 계속해서 변화해나간다.
테뉴어를 받은지 어언 30년, 반짝반짝 빛나던 30대의 어빙 피셔 3세는 더 이상 없다. 어린 나이에 휘갈긴 박사학위논문이 탑 저널에 실리며 단숨에 경제학계의 새로운 별, 산업자본주의 경제학의 마지막 희망 등등 빛나는 수식어를 달았던 나는 이제 빛바랜 사진들 속에서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산업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낡은 학자, 과거의 성취에 매여 진보를 인정하지 못하는 뒤처진 늙은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의 <제조업과 자본주의> 과목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도 대부분 나에게 뭔가 배움을 얻기보다는, 나의 주장을 논파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된지 오래다. 그나마 과거의 명성 때문에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 나를 낡은 생각에 갇혀있는 사람으로라도 불러주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나의 빛나던 커리어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시발점이 바로 지금 꺼내보고 있는 이 영상이다.
“결국 이것 또한 하나의 키워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메타버스라는 말이 만들어진 게 70년 전쯤입니다. 그때 당시 사람들은 대안적인 세계가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지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연결사회가 그때는 새롭게 형성되는 시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메타버스 세계가 아무리 정교해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과거의 생산방식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맛있고 건강한 먹거리를 찾습니다. 건강관리를 위해 의료서비스를 받습니다. 전력을 기반으로 뭔가 생산하는 제조업은 3세기 전 산업혁명 이후로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디지털 세계가 구현해주지 못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있기 때문이고, 그걸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아날로그식 생산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디미그레이션은 더 높은 수준의 메타버스를 구현한다고 하지만, 저는 이것은 단순히 마케팅 용어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시장을 바꿀 수는 있어도, 우리의 삶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어요.”
21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새롭게 발명되어 전세계 상류층의 선망의 대상이 된 ‘디미그레이션’의 영향에 대해 벌였던 패널 토론 영상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디지털 세계는 새로운 상품들을 제시했을 뿐이지 우리 삶 자체를 바꾸는, 적어도 경제학적 의미에서 바꾸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고, 선택지의 확장이 선택지의 무한함과 동치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갈증을 느꼈으므로, 디미그레이션이 충족하지 못하는 희소한 무언가를 위해 또 다시 경쟁은 시작될 터였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의 생각에 동조하는 동료 교수들도 많았다.
하지만 23년이 지난 지금 내게 동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도는 질병, 극단적인 날씨, 디미그레이션 기업들에 고용되어 상류층의 디지토피아가 운영되도록 돕는 일을 힘들게 하고도 받는 자그마한 봉급, 그리고 이런 문제들에는 관심도 없고 항상 권력을 탐하는 것만 관심이 있는 듯한 정치인들.
이런 지구의 삶에 지친 사람들은 노동, 질병, 고통, 죽음에서 해방시켜준다는 텔로미어의 카피라인에 혹해 하나둘씩 디지털 세계로 ‘디미그레이션’ 했다. 디미그레이션 비용이 급격히 줄어들어 중산층 이상이라면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가 된 데다, 갈수록 악화되는 현실 세계의 삶에 질려버린 상류층이 ‘로그아웃’함에 따라 지구의 자원은 남은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보다 디지토피아의 처리 용량을 늘려 디미그렌트들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커가도록 하는 데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공식 용어는 ‘디미그레이션’이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로그아웃’이라고 불렀다.) 22세기는 가히 디지토피아의 세기가 된 것이다.
나는 영상을 꺼내본 것을 후회했다. 젊은 나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금의 나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디미그레이션의 가능성을 조소했던 나는 텔로미어로부터 디지토피아의 경제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과제를 받아 직접 디지토피아로의 디미그레이션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겉으로는 텔로미어의 성공을 축하하고, 나의 결과적 패배에 승복하는 모양새였다. 몇 개월 전의 연구사업 출범식에서 텔로미어 재단 이사장과 나는 덕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텔로미어는 나에게 단순히 연구만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디지토피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가능성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나를 그곳에 보내서, 내 이론의 쓸모없음, 아니 경제학의 쓸모없음을 직접 보고 느끼라는 조소였다.
한편으로 나는 그곳, 텔로미어의 심장부에서 그들의 오류를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체계에서 또 다른 희소성을, 부족을 발견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아날로그로의 회귀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과거의 패기를 되새기려고 꺼내본 것이 23년 전의 그 영상이었다. 하지만 나의 미소를 담은 픽셀은 흐릿하고 불분명했다. 그때도, 지금도 빛나는 이사장의 꿰뚫는 듯한 안광만이 명쾌하게 반짝거렸다. —사학연금을 디지토피아 재단에 신탁해야 하려나. 어쩌면 연구과제가 영구한 이민으로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창 바깥을 바라본다. 디지토피아에서 제공하는 여러 주거 옵션을 고르다 결국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곳과 비슷한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하지만 바깥 풍경은 다르다. 먼지 폭풍은 없고, 하늘은 파랗고 나무들은 푸르다. 바깥에 있는 오렌지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들은 강렬한 주홍빛으로 빛난다. 옆집 아이가 낮게 달린 가지 하나를 주욱 잡아당기더니 오렌지 하나를 떼서 껍질째 먹는다. 이곳에 오고나서는 익숙해진 풍경이다. 여기의 오렌지 껍질은 오렌지 과육 맛이 난다. 아니, 오렌지 나무 자체를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근무하던 캘리포니아에도 오렌지 나무들은 테뉴어를 받았던 때 즈음 자취를 감췄다. 산림을 연구하던 동료 교수는 오렌지 나무들이 말라죽었다고 했다. 이곳에 온지 1년 반째지만, 항상 이런 것들뿐이다. 디지토피아는 디스토피아 같지 않다. 오히려, 역사책에서만 봤던 것들을 볼 수 있다.
그제는 기르는 고양이와 바닷가에 다녀왔다. 자외선 차단제를 먹지 않아도, 전신잠수복을 입지 않아도 해수욕이란 게 가능하다는 것에 이곳에서의 두 번째 여름인 이제야 적응하는 중이다. 물을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고양이와 해변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도, 야외에서 먼지 걱정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일교차가 20도 이상 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동물 털 알러지가 있어 고양이는커녕 햄스터도 기르지 못했던 내가 샴 고양이과 함께 잠을 자도 아무렇지 않은 것도, 원하는 음식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주방의 디지털 프라이어에서 바로 조합되는 것도, 다른 곳으로 마음대로 여행을 갈 수 있고, 가고 오는 시간까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직 기이할 뿐이다. 나는 디지토피아에서 부족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는, 내가 뭔가 생각으로 묘사를 할 수 있다면 그걸 제공하는 곳을 항상 찾을 수 있다. ‘반사회적인 것’으로 규정된 것만 제외하면. 그렇지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내가 완벽히 이 세계에 만족한다는 것은 아닌데. 어라. 부족한 것이 없다는 건, 희소함이 희소하다는 것인데.
무의미- 허무- 연필을 놀리던 손을 멈췄다. 한참동안 단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이었다. 항상 뭔가 얻고자 노력해야 했던 것들은, 우리에게 희소한 것들이었고, 그런 것들을 얻으면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작게는 맛있는 음식과 좋은 집, 크게는 건강, 명예, 사랑.
아날로그 세상에서 캘리포니아의 교수 연구실에 앉아 학생들과 면담을 해보면 정말 다양한 고민들을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나에게 논문 쓰는 실력을 어떻게 늘릴 수 있느냐고, 자기 글쓰기가 형편없다고 하소연하거나 글쓰기엔 자신이 있지만 무엇에 대해 쓸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누군가는 당장 다음 달 렌트를 내지 못해 퇴거당할 것 같다며, 월급을 가불해줄 수 없느냐고 물어와 차용증을 써주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 덕스라는 학생으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도 세상 만사를 귀찮아하던 학생이었다. 시험만 보면 문제들을 곧잘 풀던 그 학생은 공부가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학생은 내가 경제학과 교수들 중 가장 열정적으로 사는 것 같았다며, 그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무엇을 위해 자기 머리를 써야 할지 물어왔다. 나는 그 순간 멍하니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
당시 몇 해 전 썼던 대중서가 히트를 치면서 학계를 넘어 대중에게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나는 먹고 살 걱정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벨 에어의 저택에서 호화롭게 살았다. 나와 인터뷰 기회를 얻으려는 방송사들이 쇄도했다. 내가 갖지 못해본 것은, 초호화 요트나 정치적 권력, 노벨상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새로운 연구주제를 찾고, 동의할 수 없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를 자청하고, 새로운 대중서를 준비하면서 무의식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팔릴지 고민했다. 나는, 오래 전 석사 학위를 따기로 마음먹으면서 얻고 싶었던 것들을 뛰어넘는 성취를 거두었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달리고 있는 걸까? 나는 삶에 만족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왜 계속 새로운 일을 벌이지? 결국 그 학생에게는 틀에 박힌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교수들이 그녀에게 했을, 네가 우리 경제학계의 등불이 될 거라는, 앞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말들. 하지만 그건 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학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이고는 연구실을 나섰다. 귀찮음을 모래주머니처럼 매달고 질질 끌며 겨우겨우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 학생은, 몇 년 후 디미그레이션의 첫 실험 대상자들을 모집할 때 지원했다고 들었다.
나는 지금, 비로소 덕스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연구실에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부족함에 대한 하소연을 들을 준비를 했다가 부족함의 부재에 대한 고민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으나,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디지토피아에서 보낸 1년 반 동안 나는 부족함 없이 지냈다. 무엇이든 원하는 걸 생각하면, 집안의 대형 기계에서 – 집 밖에선 차 트렁크에서 – 꺼내올 수 있었다. 반년 전쯤 반신반의하며 하와이로의 휴가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는, 내가 원하는 코스대로 짜여진 여행계획을 보고, 또 내가 딱 좋아하는 만큼 북적북적한 분위기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호텔 레스토랑에선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에 원하는 굽기로 구워진 스테이크가 준비된 것을 보면서 감탄을 했다.
하지만 그런 풍요는 내가 뭔가 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책을 발간하고 강연을 다니면서 쌓여가는 것들 – 계좌 속의 인세와, 그보다 중요하게는 이메일 함에 쌓이는 응원 또는 질문글들 – 에 만족을 느끼곤 했는데, 이곳은 나에게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다. 풍요 속의 빈곤- 디지토피아는 성취감이 없는 공간이었다.
무언가 충분해질수록 의미는 반감된다- 이것이 가지는 뜻을 명확히 이해하려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지만, 시원스러운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젠가, 디미그렌트들은 나와 같이 의미를 상실하고 다시 아날로그 세계로의 귀환을 희구할 것인가? 하지만 원래부터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계속 가난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부유했던 사람이 가난과 맞닥뜨릴 때의 낙담, 심리적 충격이 훨씬 큰 것과 같이, 아날로그 세계에 남겨두고 온 몸으로 ‘재이주’한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생겨버린 아날로그적 한계들에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절망의 원천이 될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날로그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릴 디미그렌트들… 디지털 전환은 허구라며 평생을 외쳤던 열정적인 경제학자는 이제 냉소적인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스러워진다.
어쩌다 끝에 다다라버린 나는, 모든 걸 귀찮아하던 그 학생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디지토피아에 대하여 내가 원하던 답을 얻었다. 디지토피아는 완벽의 공간이 될 수는 없다. 풍요 속의 빈곤, 나의 리포트 제목을 마음 속으로 정했다. 조금은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무의미를 경험한 내가, 그 어떤 공간에서 다시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 해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힘이 쑥 빠지고 만다.
무기력한 상념에 빠져 반복 세팅을 해둔 노을이 스무 번쯤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로 걸어가 손을 대자마자 이질감을 느꼈다. 전화기? 디지토피아에서의 통신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걸어달라는 생각이 상대방 머릿속에 전달될 때 이루어지는데, 그래서 전화기쯤 필요 없는데. 전화기를 마지막으로 만진 게 2년이나 됐다는 게 새삼스럽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어빙 피셔 3세 맞으십니까?”
“예, 맞는데요?”
“오, 다행이군요! 저희는 아날로그 세계에서 지금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미의 Live Digit 프로그램 PD입니다.”
아날로그 세계?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존재다. 그래서 전화라는 번거로운 통신수단을 이용한 것인가.
“피셔 씨께서 디미그레이션을 하신다는 기사를 보고 저희 쪽에서는 꼭 한번 말씀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간 디미그레이션에 대해서 비판적이셨는데, 텔로미어 재단 이사장과 만나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언론 노출이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디지토피아에서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매스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유토피아적 묘사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사실 굉장히 많은데 석학이신 피셔 교수님께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가능하시다면 정기 프로그램 편성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언론 노출을 부담스러워하다니, 나를 아는 사람 중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할거다. 말도 안되는 주장을 거듭한다고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내 이야기를 펼치고자 미디어를 찾았던 나로서는 오랜만에 들어온 섭외 요청에 마음이 조금 들뜬다.
“예, 좋습니다. 프로그램 개요 설명을 좀 더 해주시죠.”
“아 예, 구체적인 설명 자료는 저희가 파일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이메일로 넣어드려도 될까요?”
“예, 그렇게 해주시죠.”
디지토피아에서 아날로그 세계로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이라니…!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는데, 그런 이야길 해볼 수 있는 대상이 생길 것만 같아 정말 오랜만에 설렘을 느낀다.
내게 필요했던 것, 부족했던 게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을 나눌 기회들, 디지토피아의 행복에 대해서 내 말을 들어줄 사람. 모든 걸 할 수 있는 세계라고 했지만 디지털 세계와의 소통이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앞의 모든 것이 잘 꾸며진 기계장치로 이뤄진 연극 무대가 아닌가. 그렇지만 이 기회는 조금은 다를 것 같다. 아날로그 세계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더해지며 오랜만에 기대에 가득차본다.
노바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노바가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그리곤 했던 그 바다와 같았다. 개별적으로 쪼개진 암석들은 다 함께 깍아내린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상절리를 파도는 화가난 듯이 힘껏 때리고 있었다. 푸른색과 초록색, 그리고 청록색이 적절히 섞인 파도는 주상전리를 때리고 흰색으로 없어졌다. 그곳에서 노바는 덕스를 만났다. 그녀는 회색의 긴 머리에, 꼿꼿한 허리와 싱그러운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멋진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색 톤의 투피스 정장을 입은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나이 또래에서 볼 수 없는 표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밝은 얼굴로, 마치 순백의 하얀 아이의 웃음 같은 미소를 띠며 노바를 불렀다. 덕스의 얼굴에는 얼굴의 주름이 많았지만 대부분의 주름은 오랜시간동안 웃음의 형태를 따라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모습이었다.
‘저런 순전한 웃음을 본 것이 과연 얼마만인가’ 노바는 생각했다.
‘저는 오늘 노바씨와 함께하게 된 덕스라고 합니다. 노바씨는 이곳이 처음이시겠지만, 제게는 이렇게 설명을 드리는 것도 노바씨가 마지막이겠네요. 이 곳은 아날로그 세계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략적으로 지금까지 디미그렌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간단하게 설명드려 새로운 디미그렌트들의 적응을 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디지토피아에서는 죽음이 선택으로 바뀌며,...’
‘잠시만요’ 노바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말씀을 끊어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잠시 좀 생각을 정리해도 괜찮을까요? 지금 약간의 생각이 정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제가 좀 생각을 할 시간을 가져도 괜찮을까요?’
‘물론 입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시간을 가지세요. 저희에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덕스가 찡긋 윙크를 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좋다.”는 노바의 삶의 모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절대 같은 옷의 조합을 두번 입지 않았으며, 살아오면서 같은 곳에 1년 이상 머물지 않았다. 여행을 갈 때도 이어서 같은 대륙으로 가지 않았다. 그의 여행지 선택을 보면 비둘기집의 원리가 떠오르곤 했다. 그가 7번의 여행을 갔다면 절대 2번 방문한 대륙은 없었으며, 72번째 여행을 다녀온 지금 그는 12번 이상 방문한 대륙이 없다. 연애상대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날 수 있는 최대한 다양한 인종의 남성, 여성과 연애를 해보고, 새로움을 경험하기 위해 결혼하고, 이혼했다. 새로움을 좋아한다는 그가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이 의아하겠지만, 그에게는 결혼조차 새로운 경험이니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새로움을 계속 느끼기 위해 무언가 오랫동안 열심히 할 수 없었다. 그가 젊었을 때 노인들은 사람이란 모름지기 부를 쌓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하나에 꾸준히 집중해야 한다고 설파하곤 했다. 당연히 노바에게 그 이야기는 따분한 공룡들의 이야기로 들렸다. 노바에게 성공이란 새로운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바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살아온 삶을 기록하는 것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쓰기에서 ‘미시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미시감은 마치 예전에 본 것 같다는 의미의 기시감과 반대의 의미로,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느낀다는 의미다. 여행을 갔을 때 자신이 느낀 것을 기록하다 보면 이 여행이 다른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내 주변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을 통해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항상 예민하고 면밀하게 주변을 관찰했고, 그런 예민함이 새로움을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했다. 젊은 날에는 넘치는 에너지와 상대적으로 적은 경험 덕분에 사소하게 다른 것만 해도 충분한 새로움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일 수록 그 모든 경험과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기에 어려움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돈이 요구되는 것에서 그가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새로움을 위해 돈을 버는 노력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그가 새로움을 느끼고 싶어서 적어놓았던 글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이었다. 노바가 쓴 글 중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어딘가에 올리기만 하면 사람들은 몰려왔고, 그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면 언제나 잘 팔렸다. 그 글과 책으로 판 돈으로 노바는 계속 새로운 경험을 했고, 그 새로움 덕분에 계속 끊임 없이 글을 써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생각에 잠겨있던 노바는 덕스가 계속 자신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 혼자 이렇게 말도 없이 있어 죄송합니다. 좀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어요’
‘괜찮아요, 많은 분들이 처음에는 그런 시간을 필요로 하시더라구요. 노바씨에게는 긴 시간이었지만 기다리는 제게는 그렇게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멋들어진 파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금세금세 흘러가죠.’ 덕스가 말했다. 그녀에게선 뭐랄까 여유와 함께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젊음의 싱싱함, 그리고 오래된 지혜가 함께 느껴졌다. 이를테면 아주 오랫동안 숙성된 와인을 갓 열었을 때의 신선함이랄까.
‘그럼 생각정리가 많이 필요하시면, 직접 이야기를 해주시면 어때요? 혼자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할 때 생각이 더 잘 정리가 되더라구요 저는’
‘아 그럴까요?’ 남의 부탁에 흔쾌히 응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노바는 홀린 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저는 사실 아주 오래전 부터 기업 텔로미어의 주주였습니다. 그들의 새로움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의 새로움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텔로미어는 죽음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 기업이 상상한 죽음의 죽음은 뇌를 디지털 네트워크에 업로드 하는 형태였다. 그때 당시의 인류는 염색체의 말단 소체인 텔로미어(telomere)를 '생명 연장'의 비밀을 풀 열쇠라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선 인간의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며 인간을 유기체로서 한정해 놓은 것이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인류는 아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라는 틀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수 많은 조만장자들이 뇌를 네트워크에 백업을 해놓았지만, 여전히 그 뇌를 다시 아날로그 세계에 가져올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텔로미어라는 기업은 담대하게 그 생각의 틀을 깼다. 역설적으로 본인들의 기업명을 텔로미어라고 하며 당시의 과학계의 틀을 깨는 용감한 질문을 했다. 바로 아날로그 세계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인류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그 세상을 그들은 디지털과 유토피아를 합쳐 디지토피아(Digitophia)라 부르기로 했다. 그들은 백업한 뇌의 데이터와 상호작용하는 세상을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데이터가 번성할 수 있도록 말이다.
기업 텔로미어는 꿈과 미래를 팔았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결국 모든 것을 가져도 그 모든 것이 죽음으로서 거품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지 않는 디지토피아라는 말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결국 극복해보겠다는 뜨거운 도전정신은 많은 인류의 뇌와 함께 공진했다. 노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바가 글을 써서 모아 놓은 대부분의 돈은 이 텔로미어 기업에 투자되었다. 그렇게 텔로미어는 그때까지 뇌 네트워크 백업을 하며 남겨둔 거부들의 유산을 비롯하여 사실상 인류 대부분의 부를 투자받았고, 인류 지성인들은 모두 그 연구를 진행했다.
그렇게 텔로미어는 결국 디지토피아를 만들어 냈다. 백업해 놓았던 네트워크들이 나름의 형태를 가지고 디지토피아 내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하는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은 당시의 살아있는 사람을 디지토피아로 보내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물론 처음에는 위험했다. 아날로그 세계의 육체가 안전하게 보존되라는 확신도 없었고, 디지토피아에서의 삶이 아날로그의 삶에서 제공하던것을 모두 비슷하게 누리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인류는 디지토피아 드림을 꿈꾸며 디지토피아로 이민(Immigration), 즉 디미그레이션(Dimmigration)을 꿈꿨다. 사실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막연한 세상에 도전하고, 희망을 품는 것은 인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콜롬버스가 떠났고, 20세기 초 기회의 땅 미국으로 어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많은 사람들이 이민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달을 쫓았고, 화성을 향했으며, Bernard 항성에까지 도달했다.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우함과 가난함을 벗어날 수 없었을 수도, 혹은 그저 인류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인류의 도전정신 그 자체 때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류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보상받게 될 것이란 꿈, 부유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혹은 그저 탐구정신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배에 탑승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디미그레이션을 하며 노바역시 무궁무진한 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텔로미어는 선택권을 팔았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었다. 교통수단을 발전으로 한국에서 태어나도 영국에서 살수 있듯, 태어난 곳에서 먼 곳에서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생겼고, 자신이 원하는 혹은 자신이 속한다고 믿는 성별로 바꿀 수 있게 되었으며, 고통 없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는 것 역시 선택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나이들어 병들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텔로미어 전까지 선택이 아니었다. 죽음의 방법과 죽음의 타이밍을 선택할 수는 있었지만, 어떠한 기술의 발전도 죽음 그 자체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었다. 인간은 극복과 발전 못지않게 합리화와 순응에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종이다. 결국 그렇기에 인류는 죽음이라는 대전제에서 모든 철학을 논의해갔다. 시간이라는 자원이 가지는 유한함을 전제로 모든 논의가 이루어졌다. 합리화 덕분에 인간은 의미라는 것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인류의 한계인 죽음을 극복하지 못해도, 삶에 대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무한하게 삶을 연장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예술작품, 과학, 혹은 철학이 자신의 삶 이상으로 연장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이겨내려고 했다. 다른 일부는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세를 만드는 것으로서 자신을 연장하려 했고, 또 다른 일부는 종교를 통해 윤회와 천국을 믿으며 삶의 가치를 만들었다.
노바는 인간의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 유한함 때문이라던가 하는 논의는 사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진정한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는 경험 혹은 아주 생생한 상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죽음이 없는 삶을 경험하지 못했고, 죽음이 없는 삶에 대한 생생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것을 불가능 한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가능성을 닫아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무한한 것은 가치가 없을까? 우주는 유한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무한히 팽창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우주는 가치가 없을까? 무한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고혹적인지, 인류는 진정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도취되지 못한 것이다.
선택의 다양성은 풍요로 이어진다. 더 깊은 논의와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여전히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죽음을 전제로 삶을 주재했다. 디지토피아에 디미그레이션을 한 이후, 다시 아날로그 세계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죽음을 온전한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반드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만하는 무언가가 아닌,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무엇보다 영원히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말이다. 노바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새로움을 한껏 즐기고, 노바는 그렇게 또다른 새로움을 위해 감연히, 용감하게 디지토피아로 향했다.
‘그렇게 디미그레이션을 결심하신거군요. 다시 한번 설명을 드리자면 이 곳은 아날로그 세계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략적으로 지금까지 디미그렌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간단하게 설명드려 새로운 디미그렌트들의 적응을 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디지토피아에서는 죽음이 선택으로 바뀌며, 아날로그 세상에서의 개념들은 송두리째 변하고 있어요. 먼저 부의 개념이 약해졌죠, 부의 축적을 통해 그 전의 인류가 가질 수 있던 것은 경험의 밀도였습니다. 부를 통해 세상에 내가 원하는 방식의 가치를 불어 넣거나, 노동을 통해 나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 혹은 새로운 경험을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부를 쫓게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었죠.’ 덕스는 정말 신이나는 일인 것 처럼 말했다.
노바는 그런 덕스의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 있었다. 내용 자체가 새롭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덕스는 원숙하면서도 명랑하게 이야기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정말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되었다. 배경으로 보이는 기나긴 절벽과 함께 보이는 무엇이든 삼켜버릴 것 같은 파도의 소멸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하는 말과 어울렸다.
그러나 이는 모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정되고 비슷한 시간을 살 때 해당하는 이야기다. 죽음이 선택이 된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무한한 자원이었다. 그렇기에 경험의 밀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성공과 실패라는 전통적인 개념도 사라졌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는 개념 역시 한정된 시간이 있을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무한한 시간이 있기에 사람들은 권력이나 부, 명예에 아주 빠르게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위와 같았다.
‘부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은 재밌네요. 그럼 보통 디미그렌터들은 뭘 원하나요?’ 노바가 생각을 정리하고 물었다.
“부의 무의미는 어떤 철학적 논의보다는 실증적인 경험으로 부터 얻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아날로그 세상에서는 돈을 꽤 많이 벌고 싶어했고, 많이 벌었었습니다.” 다시 한번 짧게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사실 노바씨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노바씨의 아날로그 세상에서의 삶을 대략 들었잖아요?- 막상 큰 부를 얻고 나니 그 부는 큰 의미가 없지 않았던가요? 부를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들은 주로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디미그레이션을 통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시간이라는 자원을 무한하게 얻었으니까요. 그러니 더 이상 자원을 더 많이 가지는 것에 대한 욕구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없어진 것 같아요. 저도 그랬던 것 같고요. 그래서 디미그렌트 1세대들은 아주 다원화된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답니다.”
노바에겐 이것들이 흥미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신만의 원하는 방향을 찾아 나간다면 그 사람들을 하나 하나 만나보고 그 사람들이 추구해본 방향들을 하나 하나 경험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경험해 볼 그 경험은 지금 이렇게 생기넘치고 의기 양양하고 상냥한 덕스의 방향성을 따라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덕스 씨는 요즘 뭘하면서 지내시나요, 뭘 좋아하시고, 요즘 추구하는 가치라던가?”
그러자 덕스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는 퍼펙티오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퍼펙티오는 진정한 의미의 선택에 해당하는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졌어요. 아날로그 세상에서의 죽음은 대부분의 문명에서 슬픈것으로 여겨졌죠. 저 역시도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슬픔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니까요.”
이때 그녀의 얼굴은 처음으로 아주 짧게 일그러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몰랐겠지만 언제나 예민하게 새로운 자극에 더듬이를 세우고 살아왔던 노바는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생각해보면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죠. 자신이 원해서 가지는 섹스는 한 개인에게 행복과 결합감, 안정감을 줄 수 있겠지만, 반대로 강요에 의해 벌어진 성관계는 누군가를 파괴할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퍼펙티오는 인생의 모든것들을 경험하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죽음을 선택하려고 되겠다는 판단에 일주하여 이뤄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히제카(Physica)씨께서는 이곳에서의 일평생 동안 물리학에 몰두하시고 스스로 나름대로 원하는 답변을 얻으신 후 퍼펙티오로 자발적으로, 아주 평온하게 들어가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퍼펙티오는 슬퍼하지 않았으며, 이는 삶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여겨졌어요.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그 퍼펙티오는 축하했고, 존중해주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것 참 역설적이네요. 죽음을 극복하고자 온 사람들이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완성이라고 본다니요.” 노바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답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선택의 여부에요.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일부지요. 그리고 저는 마침 곧 퍼펙티오를 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표정 중 가장 원숙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언제요?”
“사실 노바씨를 디지토피아에 잘 적응시키고, 노바씨가 이제 더 이상 제 도움이 필요 없고,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을 마지막으로 저는 퍼펙티오를 해보려고 합니다.” 덕스가 말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좋아했던 노바였지만, 이런 생각과 세계는 지나쳤다. 노바가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새로움이 아니었다. 덕스의 순수한 맑음이 당황스러웠으며,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살려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느껴 곤혹스러웠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 노바씨가 적응을 못했는데 먼저 퍼펙티오를 하진 않을 겁니다. 저는 맡은 일을 끝까지 하는 것 만큼은 정말 항상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고, 항상 그 점을 제 스스로의 가장 큰 자부심으로 여겨왔답니다.” 덕스가 덧붙였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나요?”
“퍼펙티오를 하는 이유요? 저는 우선 제가 이 세계에서 이루고 싶었던 것을 모두 이뤘습니다. 제가 삶을 통해 답에 가까워 지고 싶었던 질문에 대해 충분히 사고해봤고, 그 질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답을 들어보았고, 부족함 없이 경험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궁금해졌어요. 이 다음의 삶은 무엇인지, 그런 것이 존재하긴 하는지, 만약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삶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떨 것이며, 어떤 질문을 하며 살아갈지요.” 덕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 마침 지금까지 본 파도 중 가장 큰 파도가 세게 절벽을 치며 부서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마치 파도가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바의 새로움을 향한 안테나가 다시 작동했다. 노바는 궁금해졌다.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 마침 자신이 말해야 덕스가 떠날 수 있다고 한 만큼, 노바는 다른 그 무엇보다 퍼펙티오를 하겠다는 덕스의 삶의 여정과 그 결정을 이해할 때 까지 덕스를 놓아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깥에서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다. 비가 유리를 강타하는 소리가 흡사 드럼 연주자의 연주 소리 같았다. 프루드가 디지토피아에 관한 소식을 듣고 싶다고 생각하자 주파수는 97.3 MHz가 되었고 디지토피아 소식을 들려주는
지미: 안녕하세요 지미의
피셔: 안녕하세요.
지미: 디미그레이션 속 이야기들을 준비 하셨다면서요?
피셔: 네 맞습니다. 아날로그 세계와 다른 점이 있지요.
지미: 어떤 점이 다른가요?
피셔: 음, 우선 디지토피아의 개념에 대해 청취자들에게 잠깐 짚고 넘어가죠.
지미: 디지토피아에서는 자원이 무한하다죠. 필요한 물건과 재화는 뭐든 만들 수 있다고요. 건강하게 영생을 하니까 시간도 무한하다고 볼 수 있고요. 맞나요?
피셔: 정확합니다. 그리고 만약 희소함이 가치를 가져다 준다면, 무한하다는 성질이 자원과 시간의 가치를 손상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미: 오호. 돌멩이가 흔하기 때문에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것처럼요? 그럴 수 있겠네요. 예를 들어 요즘 핫한 최신 스마트폰이 모두에게 다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자신의 핸드폰을 자랑하지 않을 거에요.
피셔: 맞아요. 물론 누군가는 ‘희소성만이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디지토피아에서 선물의 무의미함을 보았어요. 이를테면 누군가 디지토피아에서 당신에게 최신 스마트폰을 선물한다고 한들 기쁜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지미: 음 그건 선물 받지 않아도 원하면 가질 수 있잖아요. 디지토피아에선 모든 게 가능하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아무도 서로에게 선물을 줄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이군요!
피셔: 네 맞아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우리는 왜 꽃을 받았을 때 감동할까요?
지미: 모르겠어요. 그치만 아내가 해줬던 얘기를 떠올려 보면 그 꽃이 아름답기 때문보다는 꽃을 사기 위해 준비한 제 노력과 시간에 감동했다고 하더군요.
피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꽃이라는 선물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담겨져 있어요. 그게 바로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죠. 그리고 처음 꽃집을 가서 머뭇거리는 남자의 모습, 그런 것을 여자는 떠올리는 거예요.
지미: 그렇군요. 그런데 시간이 무한해진 이상, 꽃을 사는데 들인 시간은 더 이상 큰 의미로 느껴지지 않겠네요. 또 꽃집을 가서 머뭇거릴 필요 없이 모든 꽃을 다 살 수 있으니까 어떤 꽃을 사갈까 하는 고민도 꽃에 담지 못하겠네요.
피셔: 맞아요. 그 세계에선 유의미한 선물이 없어요. 그것이 주목할 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죠. 혹시 노을 보는 것 좋아하십니까?
지미: 아 물론이죠. 저녁을 요리하다가도 하늘이 붉어지면 잠시 창가에 머물러 창밖을 바라본답니다.
피셔: 저도 노을 참 좋아하는데요. 노을을 매 시간 언제든 볼 수 있다면 어떠시겠어요?
지미: 아 그러니까 지금 저희가 라디오 방송을 하는 이 순간에도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핀 후에도 볼 수 있다면요? 음 그럼 노을이 그렇게 매력적일지 모르겠네요. 그냥 지금의 하얗고 퍼런 하늘과 다를 게 없지 않나요? 언제든 볼 수 있다면 굳이 있을 때 볼 필요를 못 느낄 거에요.
피셔: 제가 디지토피아에서 느꼈던 그대로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느때나 원하면 노을빛에 붉으스름한 한강을 바라볼 수 있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공간을 이동하고 원하는 시간대를 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아마 어린왕자도 디지토피아에 갔다면 노을을 붙잡기 위해 의자를 당겨 앉을 필요를 못 느꼈을 거에요. 실컷 보고나서 물렸겠죠.
지미: 피셔 님의 노을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로 인간은 공기처럼 항상 누리는 것들에는 행복이나 감사함을 못 느낀다는 게 실감나네요. 땀 흘려 직접 재배한 농작물이 마트에서 손쉽게 산 것보다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우리는 없었던, 부족했던 상태에서 그것을 더 많이 누리게 될 때 비로소 만족을 하는 게 아닐까요.
피셔: 훌륭한 말씀이세요. 제 이야기를 비유를 통해 더 확장시키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어린왕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은데 제 시간이 남았나요?
지미: 5분 남았는데 빨리 해보시죠.
피셔: 자기 별의 장미꽃만을 보았던 어린왕자가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속상해했죠. 그런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지미: 피셔님 저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저 이래 봬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어린왕자입니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라고 말했죠.
피셔: 아 그러셨군요. 정확하십니다. 여우는 그러니까 생텍쥐페리는 꽃에 들인 시간 때문에 꽃이 그토록 소중하다는 점을 꼬집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아날로그 세상에선 커플들이 서로를 보고 싶은 마음에 몇 시간 씩 차로 이동하기도 하잖아요.
지미: 저도 아내랑 연애할 때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집 가는 방향이 다른데 집에 데려다줬었어요. 그런 낭만이 디지털 세계엔 없다니 퍽 섭섭한걸요.
피셔: 그러니까요. 그리움이란 감정이 소멸되었다고나 할까요? 닿고 싶은데 닿지 못할 때 그리움이 생기잖아요. 멀리 떨어져있는 친구라던가. 사별한 부모님이라던가.
지미: 그러네요. 죽음이 없는, 물리적 거리가 주는 한계가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움을 알까요?
피셔: 물론 그리움이란 조금 미화된 감정일수도 있어요. 막상 만나고 부대끼고 나면 절절함이 금방 사라지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그리움을 느끼면서 내게 소중했던 사람이란 걸 깨닫곤 하죠. 그런 게 없어요 디지토피아에선.
프루드는 피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비를 맞고 달리는 차를 운전하며 생각했다. 창 밖을 보니 수많은 자동차 중 자신만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운전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며 겨우 겨우 따낸 권리였지만, 실제로 이 권리를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라디오 소리가 끊기더니 프루드가 얼마 전 구입할까 생각했던 제품인 디지토피아에서도 시드는 꽃 광고가 나왔다. 꽃이 시들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프루드가 혹시 이런 것은 없을까 하고 생각했던 제품이다. 얼마 전 생각의 쿠키 수집조항을 거부하지 않았더니, 그새 프루드의 생각을 읽고 광고를 해주었다. 프루드는 또 자신의 생각이 나를 위한 제품을 추천해준다는 핑계로 새어나간 것에 다시 분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샐리에게 아름답지만 곧 시드는, 아날로그의 가치를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꽃을 선물할 생각을 하니 신이나긴 했다. 샐리에게 편지를 보낸 수많은 날들, 디미그레이션 이후에 샐리의 연극을 보지도 대화를 하지도 못하니 샐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 참 많았다. 프루드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연극 ‘햄릿’에서였다. 햄릿의 약혼녀 오필리어를 연기한 그녀의 연기는 가히 인상적이었다. 아니 연극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연극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는 그녀의 연극이 있을 때마다, 연극을 보러 차를 몰고 갔다. 그녀의 연극을 보러 가기까지는 차로 3시간 반. 휴게소를 들르지 않고는 못가는 먼 거리였다. 그러나 도착해서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나면, 피로는 온데간데없었다. 혹여나 그녀가 내가 앉아있는 자리를 알아볼까, 그녀가 관객석을 쳐다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시간 조금 안 되는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면 어깨가 들썩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모든 사랑 노래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그는 그녀를 조금 더 자주 보고 싶었고, 공연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샐리가 디미그레이션 해버린 것이다. 프루드에게는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말 한마디만을 남겨놓고 그녀는 떠나버렸다. 프루드가 운전을 해도 닿지 못하는 먼 곳으로 가버렸다.
프루드는 디지토피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절대 인생의 가치를 디지토피아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디지토피아를 꺼려한 프루드에게 그녀의 디미그레이션은 영원한 이별을 뜻했다. 처음으로 그는 디지토피아로의 이주를 고민하고, 디지토피아 관련 라디오 소식과 기사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프루드는 매주 금요일 퇴근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이제는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읽어 이메일의 형식으로 자동으로 글을 써주기도 한다. 또한 굳이 형식이 필요 없는 내용이라면 생각 그 자체를 원하는 사람에게 전송할수도 있다. 손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곤 이젠 정말 프루드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루드는 항상 편지지에 쓰기 전에 항상 노트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쓰고 싶은 말을 골랐다. 편지에 쏟는 정성과 시간이 가치를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선 항상 예쁜 글씨로 한 자, 한 자를 옮겨 적었다. 그러나 샐리에겐 이상하게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왜 그런 걸까?
처음엔 샐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디지토피아에서 무슨 신변에 문제가 생길리가 있나. 그 다음엔 편지가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럴리도 없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적은 없었다고 하니까.
그러나 라디오 내용을 떠올려보니 샐리가 디지토피아의 시간에 익숙해진 까닭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만약 디지토피아의 시간감각에 이미 길들여졌다면 샐리에게 프루드의 두 시간 공들인 편지는 1~2분 짜리 휘갈겨 쓴 메모에 지나지 않는달까. 삶이 무한한 세계에서 시간의 가치를 다르게 느낀 탓이 아닐까.
차로 라디오를 들으며 한참을 이동하니 어느새 빗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호우 지역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차가 나아가는 듯 했다. 잠시 맛있는 음식을 제공받을 생각으로 차를 가에 차선으로 옮겼다.
차를 휴식모드로 옮기니 중요메일이 2개나 와있었다. ‘요즘 프루드님께서 많이 생각하시는 ‘셀리’를 포함하고 있는 메일이 1개 있습니다.’ 라는 알람을 보고 프루드는 얼른 그 메일에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니 자연스럽게 메일이 열렸다. 아쉽게도 그 메일은 샐리가 보낸 메일이 아니었다. 메일을 읽어보니 쿡이라는 남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샐리의 친구 쿡입니다.
프루드씨가 지금까지 꽤 오랜시간동안 샐리에게 많은 메일을 보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샐리는 프루드씨가 보내는 메일을 읽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답장은 오지 않을 겁니다.
충분히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쿡
‘뭐야 이 사람은’ 프루드는 생각했다. 맘에 들지 않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 샐리에게 편지를 쓸 때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불안함을 애써 무시하며 다음 메일로 눈길을 돌렸다. 다음 메일은 얼마 전 프루드가 제출한 ‘디지토피아의 희소성과 권력욕’ 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디지토피아와 아날로그 세계가 함께 만드는 “Digit and Analog”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프루드는 그 메일을 보고 오랜만에 짜릿함을 느꼈다.
프루드는 오랜 시간동안 디지토피아에 대한 비판점과 함께 아날로그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를 해왔다. 오랜 시간동안 디미그레이션에 반대해 온 그였지만, 본인이 한 연구를 이야기 할 때마다 계속 아날로그 세계에만 살아온 사람이 대체 무슨 디지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하냐며 핀잔을 듣곤했다. 그래서 샐리가 디미그레이션을 한 이후,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이번에는 디지토피아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그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었다. 그리고선 디지토피아라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프루드가 이번에 집중한 것은 ‘희소성’이라는 키워드였다. 프루드가 생각하기에는 디지토피아에도 분명 희소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처음으로 집중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아무리 무한한 자원을 가질 수 있는 디지토피아라지만,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희소할 것이라 생각했다. 프루드는 여전히 사랑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만나 이뤄지는 것이라 믿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은 자원이 있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개인맞춤 디지토피아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구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는 일이다.
프루드는 또한 인간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점을 짚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꼭 로맨틱한 관계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 줬으면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렇기에 디지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면 권력관계가 형성 될 것이고, 그로 인한 권력욕이 생길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권력은 디지토피아에서 역시 희소한 가치를 가질것이라 생각했다. 프루드는 계속해서 디지토피아의 불완전함을 주창햇고, 드디어 미약하게나마 공감을 받게 되었다.
프루드는 좀 전의 불안함을 잊고 그새 신이 나서 노트를 꺼냈다. 샐리에게 적을 또 다른 내용이 생겨서였다. 조금 전 본 디지토피아에서도 시드는 꽃과 함께 보낼, 아름다운 편지에 그녀에게 다시 한번 적을 생각을 하며, 초고를 적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지미의
디미그레이션의 발전 과정은 사실 지미 자신의 삶의 연대기이기도 했다. 오래 전 피셔 등과 인터뷰를 하던 초창기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디미그레이션과 자신은 함께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오늘 방송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지미는 늘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디미그레이션이 활성화된 것을 인생 최대의 행운으로 여겼다. 초창기엔 디미그레이션이 믿기 어렵고 허황된 가십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관련 코너를 진행할 기회가 삼류코미디언이었던 자신에게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간신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철저하게 준비했고, 이를 바탕으로한 시의적절한 맞장구는 패널들에게서 더욱 풍부한 발언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그는 점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벤처자금이 몰린 텔로미어社를 필두로한 몇몇 소수 기업들을 중심으로 디미그레이션이 발달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발달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법이고, 금융권의 자금을 받은 신생기업이 투자자들의 성장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소 소비자 착취적으로 변하게 되는 건 당시에는 특별히 새로운 일도 아니었죠.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주요한 문제로 떠올랐었습니다.
첫번째로 디미그레이션의 개발·유지비용 자체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과점구조 형성 및 담합으로 이용요금이 매우 높은 수준에서 형성돼 있었다는 점.
두번째로는 디미그레이션한 사람의 육체가 기업의 기술상 난맥으로 적절히 보존되지 못하거나, 설령 기술이 있더라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아날로그로 재이주할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기 어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 재이주 권리 부족과 맞물려 기업별로 디지토피아에 고유한 설정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상 이용자들이 기업에 지배/종속/착취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었다는 점. 당시 디미그레이션 기업들 각각이 폭력금지 같은 임의의 규칙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신적 폭력을 야기한다며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사례나, 종교적 도덕적 규칙을 강제했던 사례 등이 특히 큰 논란을 야기했었죠?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남아있는한, 디미그레이션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무한한 선택권을 얻는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디미그레이션은 아직 기존 경제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아날로그로 다시 돌아갈 선택권도 불충분했으며, 각 개인들의 무한한 시도는 기업들이 정한 규칙에 의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랬다. 초창기 디미그레이션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그러나 지미는 어느새 디미그레이션 관련 컨텐츠의 상징처럼 성장했었기 때문에 기업의 협찬을 받아 디미그레이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해당 기업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할 수 있도록 지미에게 강제설정을 부여하고, 보복이 두려워 아날로그로의 재이주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한한 자유가 사실은 족쇄였다는 아이러니.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새로운 기술로 생긴 문제는 으레 바로 그 기술이 해결하는 법입니다. 이 경우엔 디미그레이션이 가진 문제는 딤R&D가 해결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해결의 첫 단추는 디미그레이션 이용자들의 불안 그 자체였죠? 근사한 기술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불안으로 인해 이용자들이 크게 증가하지 않자, 당연히 기업은 이들의 불안을 낮추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아날로그—디지토피아 통신이 개발 돼 디미그렌트들이 문제 없이 살고 있다는 점을 아날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선택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안심을 주기 위해 육체관리와 재이주 기술도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과학사에서 유래없는 급격한 속도로 과학적 발견과 기술 개발이 이뤄졌는데, 이는 디미그레이션한 상태에서는 많은 제약이 없어진 최적의 환경에서 몰입하여 다양한 실험연구개발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이렇게 디미그레이션 상태로 연구개발하는 것을 바로 딤R&D라고 하죠.
그렇게 불안을 줄이고, 이용자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디미그레이션이 인류에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지만, 동시에 아직은 여러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도 절감하게 됩니다. 재이주기술은 훨씬 안정화 됐지만 여전히 기업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이는 디미그레이션 세계의 설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유지비용과 기업들의 이윤은 어떻고요! 디미그레이션 이용자들은 여전히 착취의 위협에 놓여있었습니다.”
지미는 그러한 급격한 딤R&D의 물결속에서 간신히 아날로그로 재이주하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을 폭로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일을 당했음에도 오히려 그는 디미그레이션에 부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구체적인 커리어와 방식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는 처음 코미디언을 꿈꾸던 당시의 비전: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비전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그 기업이 한 짓은 끔찍했지만, 디미그레이션 자체에는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칫 자신의 편향된 발언으로 인류의 가능성을 망쳐버리지 않도록 경계하며, 문제증상과 질병을 구분하는데 집중했다. 무엇이 질병이고 무엇이 아닌지 방송에서 아젠다를 명확히 설정하며 암암리에 사람들로 하여금 디미그레이션을 진화시킬 수 있도록 이끈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 이후 사람들의 딤R&D는 주로 더 나은 디미그레이션—기업으로부터 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안전하고, 비용절약적이면서도 고품질의 디미그레이션—의 연구개발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어떻게 에너지를 덜 사용하고, 효율적으로 서버를 활용할 것인가? 디미그레이션 품질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자원이 절약되는 구조는 무엇인가? 어떻게 기업이나 여타 세력에의 종속 없이 각 개인이 진정한 자율을 누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 그 외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새로 발생할 때마다 앞으로 끝내주게 잘 해결할 문제해결방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많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딤R&D를 통해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 주었죠.”
사실 그렇게 원활하게 디미그레이션의 진화가 이루어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실질적인 반대세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보통 이런 변화는 반대세력이 있기 마련이고, 이 경우에는 초창기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그 반대세력이 되는 게 전형적일 터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했던가. 나중에 지미는 자신을 가뒀던 바로 그 기업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대중매체에서 기존 디미그레이션 기업들이 이러한 변화과정을 방해하는 악의 축처럼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이 기업들이야 말로 디미그레이션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기업들의 경영진이야말로 당대에 가장 디미그레이션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그 사람들이야말로 디미그레이션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디미그레이션의 여러 한계가 해결되면 가장 먼저 아날로그를 떠나 디미그레이션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역성 문제, 비용문제, 지배종속문제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해결되던 시기에 디미그레이션 기업들의 경영진이 대거 디미그레이션하여 아날로그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죠.”
물론 지미 자신도 그 즈음 아날로그를 떠나 지금까지 오랜세월 디미그레이션 속에서 방송을 진행해왔다. 디미그레이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화 됐고, 모든 사람이 디미그레이션한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디미그레이션을 알리고 아날로그와 디미그레이션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한다는 지미의 소임은 이제 완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여러 문제극복의 역사 끝에, 디미그레이션은 소수의 기업이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며 경쟁하던 구도에서 벗어나, 상호 견제와 협력을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개인 각각을 위한 디미그레이션을 통해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진정으로 무한한 선택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으로 ‘인류가 완성됐다’고 평가하기도 했죠. 그러나 무한한 선택권이 인류의 모든 문제 종결과 인류 역사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는 아직 갈 길이 남아있었던 거죠. 다음 시간에는 2차 재이주 운동에 대해 다뤄봅시다.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미의
‘인류에게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지……’ 하지만 지미는 자신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디미그레이션의 완성까지 오랜 길을 걸어왔다.
어쩌면 그걸 다시 한 번 더 넘어서는 길은 ‘새로운’ 사람들이 걸어야 할지 모른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으며, 그의 뒤를 이을 좋은 경쟁자들도 이미 많이 알고 있었다. 2차 재이주는 그들이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디미그레이션 발전 역사라… 내 마무리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애초에
그는 완만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퍼펙티오에 들어섰다. 마지막 방송까지 일언반구 내색하지 않았으니 그의 퍼펙티오는 거의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개인사를 철저히 관리하며 평생을 공인으로 살아간 그다운 완결이었다.
“10초전! 9! 8! ……”
번쩍이는 붉은 섬광과 끝내주게 요란한 사이렌 소리로 봐서는 분명 장난 아닌 상황인데, 우리 승조원들은 묘하게 차분하다. 생사를 몇 번이고 넘나든 정예요원이라서? 전혀 아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은 ‘생사’가 뭔지도 몰라서, 지금 전혀 실감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갓 재이주한 햇병아리들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건지 원.
‘디미그레이션으로 인류에 내재된 모든 가능성을 이미 탐색했기 때문에, 이제는 인류 외부에서만 인류가 더 발전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노바님의 <2차 재이주 운동>은 디미그레이션에 다소 질려있던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물리학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노바님의 숭고한 뜻에 감명받아 거의 초창기부터 동참했고, 지금은 이렇게 한 우주탐색선의 선장까지 맡고 있었다.
외부세계는 디미그레이션 세상보다야 훨씬 위험했지만, 사실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재이주한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육체적 사망을 맞이해도, 정신은 쉽게 다시 디미그레이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의 영생하고 있었고, 일종의 색다른 유희처럼 생각하며 재이주 하는 신입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단 말이다!
우리의 현재 임무는 히제카(Physica)님의 이론에 기반한 광범위 우주 직접탐색을 수행하며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이미 인류의 디미그레이션 센터로부터 몇 백만광년이나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탐색선에 대한 통제를 잃고 속절없이 저 거대물체와 충돌하여 산산조각 나버리고 나면, 언젠가 인류가 우리를 발견해서 다시 디미그레이션 시켜줄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탐색선의 통제를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디미그레이션 내에선 문제 없이 작동하다가 외부에서는 문제를 일으키게 한 차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나와 저 얼빠진 승조원들은 디미그레이션이 안착된 이래 처음으로 비자발적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응? 근데 왜 아직도 이렇게 잡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지? 10초는 진작에 지난 거 같은데 말이야. 디미그레이션 이전 선조들은 고전적 죽음 직전에 주마등이란 걸 경험했다고 하기야 하더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오래 걸리는 거였단 말이야?
“ 선장님,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어?”
“저희 탐색선이 해당 정체불명물체와 생각보다 굉장히 ‘폭신’하게 부딪혔습니다. 충돌로 인한 피해도 전혀 없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잡상에서 깨어나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승조원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 여기서 가장 얼빠져 보였던 것은 나였던 모양이다. 나는 선장으로서의 위엄을 얼른 회복하기 위해 연습했던 대로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저런 질량의 물체와 그 정도 수준의 속력으로 충돌했는데 피해가 전혀 없다고? 그게 물리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네 분명 ‘우리의 물리학’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물리학’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나 봅니다. 아마 저 물체는 외계인들의 디미그레이션 센터 같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쪽에서 통신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선장님. 얼른 가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선장님때문에 인류란 느릿하고 안일한 존재라고 생각해버린다면 영 곤란할테니까요.”
이 자식 이름이 뭐더라? 나를 반쯤 놀리고 있구만. 아마 연습했던 날카로운 표정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상기된 표정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 자식은 그저 지금 이 ‘최초의 접촉’에 굉장히 흥분한 상태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고.
맞다. 우리 인류는 디미그레이션으로 기술을 고도화 해왔으나, 이렇게 외계의 존재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얼른 그들과 통신을 시도했다. 나 때문에 인류가 지각쟁이가 됐다고 ‘역사’에 남아 버리면 안 되잖아?
그들과의 소통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나 우리나 어떤 신호에서 의미를 추출해내는 기술만큼은 극대화 돼 있었다. 디미그레이션은 신호 기술의 정점이었고, 디미그레이션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신호’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그들이 좀 더 뛰어났다. 과거에 발견했던 물리학의 편견 때문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물리학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류는 디미그레이션 센터의 안전을 위해 소행성 충돌 등을 포착/회피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그들의 디미그레이션 센터를 엄청나게 ‘폭신’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그 무엇과 부딪혀도 양 쪽이 피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폭신하게 말이다. (그들이 우리 탐색선도 폭신하게 고쳐줬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임의의 물질을 그렇게 폭신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이 폭신한 물리엔진이 반영된 디미그레이션 세상에서 더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여러 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지만, 당연히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물리학계였다.
물리학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3차원의 세계만을 경험했던 우리는 시공간 개념을 통해 4차원으로 확대했고, 우리가 점이라고 생각했던 만물의 근원을 끈으로 확장시켜, 초끈이론이라는 것을 통해 물리학이 11차원까지 올라갔다. 아무리 많은 고민을 3차원에서 해봤자, 그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의 물리학에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연쇄적으로 기존의 이론들이 수정됐고, 새로운 깨달음들이 잇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들이 다시 인류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디미그레이션에서 가능한 것들을 급격하게 바꿔 놓았다. 인류가 상상하지 못하던 것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재이주 기술은 우리가 더 뛰어났다. 그들은 성품도 굉장히 폭신했기 때문에(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폭신족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디미그레이션 발달 당시 재이주하지 못할까 의심하지도 않았고, 외부의 자극도 폭신하게 흘려보내기만 해왔으므로 재이주기술을 발전시킬 유인이 크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우리처럼 그들도 어느 순간 디미그레이션만으로는 그들 종족의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외부자극의 필요를 느꼈지만, 이를 위한 재이주기술을 발달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재이주 기술을 통해 폭신족이 외부로 다시 나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폭신족은 원래 그들 자신의 물리적 모습을 재현하기보다는 계속 우리 재이주 기술을 쓰기로 했는데, 그것이 협업할 때 환경을 공유하기 편했고, 거부감도 적었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뛰어난 기술에서 서로 자극을 받은 딤R&D를 바탕으로 함께 재이주 기술을 날로 더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협업 딤R&D의 성과 중 하나는 (내 탐색선이 문제를 일으킨 이유를 포함해서) 히제카의 연구 일부가 왜 외부세계에서 성립하지 않는지 밝혀낸 것이다. 아날로그는 연속이지만 디미그레이션은 이용자의 인식수준에서만 연속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이산상태였다. 이 작은 오차가 확대되어 큰 차이로 이어졌던 것이다.
아 내가 협업이라고 했나? 맞다 인류와 폭신족은 외부세계를 탐험하여 자극을 찾아내고 종족을 발전시키는데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디미그레이션 기술을 극도로 고도화한 두 개의 문명이 광대한 우주에서 우연히 점대 점으로 충돌할 가능성은 한 없이 0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최초의 접촉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아니 분명, 이 외부세계에는 우리가 아직 이해할 수 없고 상상조차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혼자서만 하기보다는 다른 강점이 있는 동료와 함께할 때, 그것들을 더 잘 찾아내고 다룰 수 있을 것이다.
0과 1, 그리고 곱셈연산만 갖고 있다면 이들을 아무리 다양하고 무한하게 선택하여 조합해도 우리는 0과 1만을 다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1과 덧셈연산을 무한히 선택하여 조합하면 자연수라는 무한집합을 만들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정수나 유리수, 혹은 실수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무한집합이라고 해서 자연수가 모든 수, 완전한 수집합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수는 닫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한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무한한 선택권과 완전한 선택권은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디미그레이션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고 해서 모든 외부거시세계를 완벽히 알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법이다. 인류 역시 인류만으로는 닫혀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인류의 역량과 이제까지 인류가 얻은 것을 조합하여 생성(제너레이트) 가능한 것들 뿐이다. 디미그레이션은 그러한 제너레이트를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다. 즉 디미그레이션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제너레이트할 재료에 따라 디미그레이션으로 우리가 도달가능한 최대치가 고정 돼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합해도 도달할 수 없는 점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당연히 인간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 닫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재료, 영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가 더 보고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밖으로 열려 있어야만 한다.
—노바의 2차 대규모 재이주 운동 연설문 중
“……다시봐도 빈약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연설문입니다. 자연수가 ‘모든 수’가 아니라고 해서 → 인류가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근거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자연수와 인류가 그런 특성을 공유한다고 볼 논리적인 개연성이 전혀 없죠. 즉 노바씨 연설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상상력이 정말로 고정’돼서, 정말로 ‘인류의 모든 것을 활용해도 도달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인류의 상상력이 수렴하지 않고 발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노바는 간신히 상대방의 말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지극히 기나긴 세월동안 새롭고 참신한 것을 사랑해왔으며, 늘 그것들을 향해 도전해왔다. 그런 자신에게 ‘진부함’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간만의 새로운 자극이었다.
논리적인 개연성 운운하는 걸 보니 이 사람의 디미그레이션 취향이 뻔히 보인다. 디미그레이션이 극한까지 발전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논리를 초월하는 디미그레이션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의 지평을 넓혔으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술의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다양했다. 그러니까 이딴 청문회 비스무리한 것도 열리는 거겠지. 같은 잡념을 간신히 미뤄둔 채, 노바는 답했다.
“자연수와 인류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죠. 그건 단순히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렴 발산도 마찬가지예요. 인류가 가진 것들을 조합한 결과가 닫혀있는지 아니면 열려있는지 어떻게 측정하고 증명하겠습니까. 이것들은 실제로 그러하다고 주장하려고 한다기보다는, 상황의 본질을 보다 잘 포착하……”
말하던 도중 다른 사람이 도중에 끼어들면서 대답이 끊겼다.
“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교조적으로 ‘새로운 재료’를 찾아야 한다는 둥 하는 부분은 제가 다 민망할 지경이네요. 설령 인류의 상상에 한계가 있고, 인류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이미 우리가 깨닫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렇게 상대방의 말을 끊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디미그레이션은 사람에게 만능감을 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느낌. 말을 끊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만능감이야말로 우리를 멈춰세웠어. 노바는 침착함과 예의를 가장하려 애썻지만, 자신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새어나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냐는 거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아마 우리가 지금껏 계속 부싯돌과 석기를 쓰며 부족생활에 머물러 있었어도 별 문제는 없었겠네요. 그 이후의 발전을 우리는 모르는 채로 있을테니까요. 그러다 아무런 문제해결능력 없이 운석충돌이나 기후이상, 강력한 전염병을 맞딱뜨려 인류가 멸종했다 한들 특별히 의식하지도 못했을테니 오히려 괜찮았을 거구요? ‘인류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어차피 알 수 없으니 상관없다’는 말은, 상상을 실제로 구현하고 새로운 상상을 떠올려 온 인류역사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는 계속 상상하는 것들을 실현에 옮겨 왔으며, 그 실현을 기반으로 이전에 상상하지 못하던 것들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게 되어 왔습니다. 디미그레이션은 그 절정이었죠. 디미그레이션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내부에 침잠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이제 다시 디미그레이션 외부로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꽤 긴 대답이었지만, 이번엔 도중에 끊기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사람이 질문했다.
“노바씨의 말은 어느정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밖으로 나가서 구체적으로 정확히 뭘 얻고자 하는지 잘 와닿지 않는군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내가 얻고 싶은 것?’ 어쩌면 노바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또는 먼 옛날 만났었던 덕스가 계기가 됐을지도 모르고. ‘모두 경험하고 고민해봤다’는 그녀의 말은 오히려 노바로 하여금 더 경험하고 고민할 것들을 찾아나서게 했고, 그것이 <외부의 자극에 닫혀버린다>는 디미그레이션의 빈틈을 의식하게 해주었다.
물론 질문자가 물어본 것은 노바가 얻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류가 얻고자 하는 것이다. 노바는 갑자기 머리속에서 물밀듯이 떠오르는 덕스의 미소를 애써 외면하며 답했다.
“아마 모두들 디미그레이션에서 물리학을 완성하고 퍼펙티오에 들어서신 히제카(Physica)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의 열정과 헌신, 공헌은 진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디미그레이션 내부에서 이뤄진 실험들도 참신하고 탄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디미그레이션 외부에서도 한치 오차 없이 성립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디미그레이션 내부에서만 실험해보았지, 외부에서 실험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런 점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위험이 존재하는 외부로 재이주하여 그 분의 물리학 연구를 디미그레이션 외부에서 재현해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디미그레이션 내부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지만, 마치 과거 우주비행사들이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고 우주로 나아갔던 것처럼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실제로 디미그레이션 내부와 외부 물리학의 차이를 밝혀내고 있고요. 이는 결코 디미그레이션 내부에 갇혀 있어서는 이룰 수 없던 성과입니다.
또 폭신족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과의 만나기 전 디미그레이션 안에서의 외계인들은 결국 모두 다 인류의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만난 외계인은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달랐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는 그들에게 각자가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디미그레이션 안에만 갇혀 있었다면 그들과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디미그레이션 센터는 그들을 소행성쯤으로 간주하고 가뿐히 회피해버렸겠죠.
디미그레이션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들을 구현시켜 주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가 가능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경험할 기회, 새로운 중요한 목표를 설정할 기회, 그리고 우리의 상상과 행복을 확장해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맨 처음 재이주 기술은 우리의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재이주 기술은 우리의 타성을 떨쳐내기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끝>